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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알리의 마지막 라운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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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0-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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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병에 걸리고도 인권 위해 싸우는 전설적인 복서 무하마드 알리

▣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그에겐 유머와 여유가 있었다. 32살에 재기전을 가질 때 친구조차 “이 경기가 끝나고 은퇴하게 될 것”이라며 걱정했지만, 그는 “어젯밤 방 스위치를 끈 뒤 방이 깜깜해지기 전에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며 웃어넘겼다. 여전히 자신은 빠르다는 자신감이었다. 1973년 에너지 파동 땐 “최단 시간 내에 상대를 잡겠다. 내가 이기는 것을 보기 위해 전세계 팬들이 전력을 낭비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고 했다. 코너에 몰려 상대에게 수차례 주먹을 얻어맞은 뒤에도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은 것도 모자라 링 밖에 있는 라운드걸에게 윙크를 보내는 괴짜였다. 분명 무너질 정도로 맞았는데도 허물어지지 않는 그의 모습에 상대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32살에 다시 링에 선 ‘한물간 복서’에게 7라운드까지 이기고도 8라운드에 쓰러진 조지 포먼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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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1966년 영국 하이베리에서 열린 WBC 헤비급 챔피언 4차 방어전에서 도전자로 나선 헨리 쿠퍼를 코너로 몰아가며 주먹을 날리는 무하마드 알리. 두 사람의 두 번째 대결이던 당시 경기에서 알리는 6회 1분38초 만에 TKO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지켰다.

선수 출신으로 첫 노벨평화상 받을까

그는 헤비급이었지만, 빨랐다. 상대는 사뿐사뿐 링을 도는 그의 발을 쫓다가 제풀에 무장해제당한다. 그에게 빈틈을 보인다는 건 링에 눕겠다며 백기를 흔드는 것과도 같았다. 한방에 상대를 허무는 돌주먹이 아니었지만, 37KO(61전56승5패)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 그는 더 이상 ‘링 위의 시인’이 아니다. 몸은 굳었고, 쉽게 말을 이어가지도 못한다.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하고, 몸을 부르르 떨며 발을 내디딘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겠다”던 그는 파킨슨병에 걸려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그는 1984년 뇌세포에 이상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은 이후 마지막 라운드를 22년째 끌고 오고 있다. 마비된 몸을 이끌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성화 점화자로 나섰을 때 그는 띄엄띄엄 끊어지는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왜 나를 보고 우셨나요? 눈물을 거두세요. 나도 이렇게 하는데 당신들은 못하겠습니까? 기억하세요. 포기하지 않는다면 불가능은 없습니다.” 그는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라운드가 참으로 편하다. 그리고 할 일이 아직도 많다”고 했다.

전설적인 복서, 무하마드 알리(65). 그가 미국에 있는 아동평화재단 공동창립자인 피터 조지와 같이 10월 중순에 발표되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그가 상을 받는다면 1901년부터 수상자를 내온 노벨평화상 역사상 첫 스포츠 선수 출신이 된다.

그는 1981년 은퇴 이후 자신이 벌어들인 돈을 대학과 인권단체 등에 기부했고, 전세계 굶는 아이들을 위해 2천만 끼가 넘는 식사를 제공했다. 전쟁 중단을 호소하고, 짓밟히는 아이들의 인권을 위해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가 “할 일이 많다”고 한 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아동평화재단을 세우고, 유엔 인가 조직인 아동총회 창립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미국 간디재단의 추천을 받아 노벨상 후보에 포함됐다고 한다. 이미 그는 2년 전 미국 민권운동에 대한 기여와 유엔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독일의 권위 있는 오토 한(Otto Hahn)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같은 이유로 미국 명문대학 프린스턴대는 그에게 인문학 명예박사 학위를 주기도 했다. 사람을 생각하는 그의 삶이 인문학의 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가 설령 노벨평화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복서로서 알리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노력하는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등을 세계 팬들에게 강렬히 심어주고도 남았다.

징집거부로 뺏긴 벨트 32살에 되찾아

본명이 캐시어스 클레이인 알리는 백인이 노예에게 붙여준 ‘클레이’(진흙)란 이름을 내던졌다. 그는 흑인 인권운동가 맬컴 엑스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교로 개종한 뒤 이름도 무하마드 알리로 바꿨다. 18살이던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복싱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땄지만, 돌아오는 길에 들른 백인 전용 식당에서 출입을 거절당하자 금메달을 강물에 집어던지기도 했다. 상대가 클레이란 노예 이름으로 자신을 지칭할 땐 그를 바닥에 눕힌 뒤 “내 이름을 다시 말해봐!”라고 소리쳤다.

베트남전쟁 징집을 거부해 스스로 옥살이를 자청하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에 아무런 원한이 없다. 흑인 인권도 보장해주지 않는 나라가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느냐”고 했다. 그는 헤비급 세계챔피언 박탈, 선수면허 정지, 재판 회부, 파산 등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1974년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을 땐 “닉슨은 대통령이지만 그 뒤엔 국민이 없다. 그의 권위엔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복싱엔 거짓말이 없다. 그래서 내 위엔 국민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조지 포먼과의 ‘세기의 대결’은 알리가 왜 위대한 복서로 불리는지를 보여준 경기였다. 베트남 징집 거부로 3년5개월의 공백을 갖기도 한 그는 32살이던 1974년, 당시 24살이던 ‘망치 주먹’ 조지 포먼에게 도전장을 보냈다. 포먼은 40연승을 달리던 강자였기에 도박사들도 알리의 패배는 당연하다 여겼다. 그러나 알리는 끊임없이 코너로 모는 포먼의 주먹 속사포를 피해 나비처럼 빠져나와 왼손 훅으로 포먼의 턱을 맞혔다. 포먼은 8라운드 막판 알리 앞에서 침몰했고, 오른손 주먹을 뻗던 알리는 고개 숙인 포먼의 뒤통수를 때리지 않으며 패자의 자존심을 지켜줬다. 알리의 시대는 이미 갔다고 한 순간, 그는 전쟁을 거부해 억울하게 뺏겼던 벨트를 되찾아온 뒤 세상을 향해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는 강자가 우글거리는 정글 같은 헤비급에서 전무후무한 타이틀 3회 획득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뒤 38살에 링을 떠났다.

“유머 있는 흑인으로, 인간으로 기억되길”

알리는 그를 지켜보는 팬들에게 이런 바람을 얘기했다. “나는 모든 이의 권리를 존중하는 유머 있는 흑인으로, 자유·정의·평등을 위해 싸운 인간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흑인이면서 장애인인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싸운 것처럼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이 세상과 맞서 승리했으면 좋겠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성공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줬다면…. 나, 알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도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갈 곳이 많다”며 내년 1월17일 66번째 생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 라운드 종이 울리기는 너무 이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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