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한이 3일이라면 넷째 날을 아는 시들, 최정례의 ‘칼과 칸나꽃’·김행숙의 ‘이별의 능력’
▣ 신형철 문학평론가
속았다. 맥주에 유통기한이 있는 줄 몰랐다.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지난밤의 과음을 자책했을 뿐 술 자체에 문제가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잊지 말자, 맥주의 유통기한은 1년이다.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략 18~30개월이 된다. 그러나 그런 거 생각하다 보면 사랑 못한다. 잊자, 18개월이건 30개월이건. 그렇다면 슬픔에도 유통기한이 있을 까? 있는 것 같다. 슬퍼하는 와중에는 그 슬픔이 천년만년 갈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슬픔의 유통기한이라는 거 의외로 길지 않다. 슬픔의 안쪽에 있는 사람은 슬픔밖에 못 보지만, 슬픔의 바깥에서 그것을 관찰하는 시인의 눈에는 슬픔의 유통기한이 보인다.
“너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래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닌 너이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이므로//너와 나 이야기의 끝장에 마침/ 막 지고 있는 칸나꽃이 있다//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 칸나꽃으로 지고 있다// 문을 걸어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칼과 칸나꽃’에서) 최정례의 네 번째 시집 <레바논 감정>(문학과지성사·2006)에서 골랐다. 너는 칼자루를 쥐고 있고, 나는 목을 들이밀고 있다. 이것이 이별의 순간이라면 너는 ‘연인’일 것이고, 사별의 순간이라면 너는 ‘신’일 것이다. 그 이별의 장소에서 나는 문득 칸나꽃을 본다. 나는 지고(敗) 있고 너는 지고(落) 있구나. 너도 ‘너 자신임’을 이기기 위해 싸우고 있구나.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 칸나꽃으로 지고 있다.” 이 구절도 멋지지만, 시의 포인트는 그 다음에 있다. 시인은“슬퍼하자 실컷”이라고 말한다. 왜? 내일의 슬픔은 오늘의 슬픔보다 옅을 것이고, 모레의 슬픔은 내일의 슬픔보다 옅을 테니까. 그렇다면 슬픔의 유통기한은 3일인가. 아무튼 이것은 “슬픔의 넷째 날”을 알고 있는 자의 노래다.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 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 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 3시간 이상씩 명상을 하고, 헛것들을 보지. 매우 아름다워./ 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 (…) 그렇군.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하염없이 낮잠을 자다가// 눈을 뜰 때가 있었어./ 눈가 귀가 깨끗해지는데/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는데/ 털이 빠지는데,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2분간 냄새가 사라지는데/ 나는 옷을 벗지. 저 멀리 흩어지는 옷에 대해/ 이웃들에 대해/ 손을 흔들지.”(‘이별의 능력’에서) 김행숙의 두 번째 시집 <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 2007)에서 골랐다. 너와 이별한 뒤에도 내가 주야장천 이별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낮잠을 자고, 때로는 명상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너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시간들을 하염없이 보내다 보면 문득 그런 때가 온다. 이제는 너와 안녕할수 있겠다 싶은 때, 그러니까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는” 그런 때. 그때 나는 제의처럼 옷을 벗고 손을 흔든다. 슬픔이여 안녕. 이 역시 슬픔의 유통기한을 알고 있는 사람의 노래다. 담담해서 더 슬픈, 그러나 ‘쿨’한 척 폼 잡지 않는, 지성이 정념을 다독거리는 노래. 시절은 가을, 너절한 슬픔들의 침투에 심신이 허약해지는 계절이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하마 나는 너를 잊었다. 그리고 이제는 너를 잃은 슬픔까지도 다 잊었다. 그런데 왜 즐겁지가 않은가. 뭔가 한 뼘 더 타락한 듯도 하고 영혼의 뱃살이 늘어난 듯도 한 이 기분은 뭔가. 슬픔이 유통기한을 넘기면 씁쓸함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거, 씹어먹으면 아마도 이런 맛이겠지.

“너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래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닌 너이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이므로//너와 나 이야기의 끝장에 마침/ 막 지고 있는 칸나꽃이 있다//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 칸나꽃으로 지고 있다// 문을 걸어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칼과 칸나꽃’에서) 최정례의 네 번째 시집 <레바논 감정>(문학과지성사·2006)에서 골랐다. 너는 칼자루를 쥐고 있고, 나는 목을 들이밀고 있다. 이것이 이별의 순간이라면 너는 ‘연인’일 것이고, 사별의 순간이라면 너는 ‘신’일 것이다. 그 이별의 장소에서 나는 문득 칸나꽃을 본다. 나는 지고(敗) 있고 너는 지고(落) 있구나. 너도 ‘너 자신임’을 이기기 위해 싸우고 있구나.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 칸나꽃으로 지고 있다.” 이 구절도 멋지지만, 시의 포인트는 그 다음에 있다. 시인은“슬퍼하자 실컷”이라고 말한다. 왜? 내일의 슬픔은 오늘의 슬픔보다 옅을 것이고, 모레의 슬픔은 내일의 슬픔보다 옅을 테니까. 그렇다면 슬픔의 유통기한은 3일인가. 아무튼 이것은 “슬픔의 넷째 날”을 알고 있는 자의 노래다.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 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 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 3시간 이상씩 명상을 하고, 헛것들을 보지. 매우 아름다워./ 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 (…) 그렇군.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하염없이 낮잠을 자다가// 눈을 뜰 때가 있었어./ 눈가 귀가 깨끗해지는데/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는데/ 털이 빠지는데,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2분간 냄새가 사라지는데/ 나는 옷을 벗지. 저 멀리 흩어지는 옷에 대해/ 이웃들에 대해/ 손을 흔들지.”(‘이별의 능력’에서) 김행숙의 두 번째 시집 <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 2007)에서 골랐다. 너와 이별한 뒤에도 내가 주야장천 이별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낮잠을 자고, 때로는 명상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너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시간들을 하염없이 보내다 보면 문득 그런 때가 온다. 이제는 너와 안녕할수 있겠다 싶은 때, 그러니까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는” 그런 때. 그때 나는 제의처럼 옷을 벗고 손을 흔든다. 슬픔이여 안녕. 이 역시 슬픔의 유통기한을 알고 있는 사람의 노래다. 담담해서 더 슬픈, 그러나 ‘쿨’한 척 폼 잡지 않는, 지성이 정념을 다독거리는 노래. 시절은 가을, 너절한 슬픔들의 침투에 심신이 허약해지는 계절이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하마 나는 너를 잊었다. 그리고 이제는 너를 잃은 슬픔까지도 다 잊었다. 그런데 왜 즐겁지가 않은가. 뭔가 한 뼘 더 타락한 듯도 하고 영혼의 뱃살이 늘어난 듯도 한 이 기분은 뭔가. 슬픔이 유통기한을 넘기면 씁쓸함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거, 씹어먹으면 아마도 이런 맛이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