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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회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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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0-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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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글 최규석

대학 시절 몇 번인가 상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어르신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라는 직·간접적인 압력을 받았다.
(만화과 초창기여서) 학과 수업이 만화 작업하는 데 도움이 된 것도 아니고 도움이 됐다 해도 도움 주신 선생님께 내가 알아서 감사를 표하면 될 일을 왜들 그러시나 했다.


대빵님의 심기를 미리 살핀 아랫사람들의 조치든, 아무것도 한 건 없지만 윗사람으로서 감사는 받아야겠다는 대빵님의 요구든, 그들의 장단에 맞춰 양주병 디밀며 “덕분입니다” 하기는 싫었다.
죽을 둥 살 둥 한 학기 400만원에 육박하는 등록금을 내야 하는 대학에서, 학생의 현실이나 장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는 분들이 스승과 제자 사이의 훈훈한 정을 꿈꾸고 계신 것도 가소로울뿐더러, 무엇보다 그건 상큼한 20대 청년이 감당하기엔 너무 느끼한 일이었다.

졸업만 하면 편하려니 했으나 압력은 졸업 후까지 따라다녔다. 성정이 독하지 못해 결국 술을 한 병 사기로 했지만, 그 느끼한 무대에 솔로로 나설 용기가 나질 않아 수상 경력이 있는 친구 둘을 합류시켰다.
물론 그들도 나 못지않게 상큼한 20대였던지라 합류시키기 위해 친구, 우정, 인연, 악연, 제발 등등의 단어가 포함된 구질구질한 협박을 늘어놔야만 했다.

연락을 받고 찾아간 고깃집은 학계 행사의 뒤풀이 자리였는지 만화학계 인사들이 빙 둘러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술만 살짝 전달하고 나오려는 데 기분 업되신 대빵님이 술을 한 잔씩 돌리란다. 눈 딱 감고 장단 맞춰 춤이나 추려던 것이 스트립쇼까지 해야 할 판이 된거다. (친구들 앞에서 자식 자랑하고픈 아버지의 심정과 비슷한 것이었겠으나 지금 대학이 어디 학생이 집처럼 생각할 수 있는 곳인가.)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건만 내 상큼한 친구들은 이미 저 먼 곳에서 키득거리고 있었다.
어색한 스마일 가면을 면상에 깔고 술을 따르는 내게 어르신 한 분이 결정타를 날린다.
“허허, 젊은 친구가 참…사회생활을 잘하는구먼.”


그 후 몇 년간 놀림거리가 된 것과는 별개로, 이런 사회에서라면 성공하기 참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들 즐겁게 해주는 재주와 양주 살 돈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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