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소리없는 개인후원… 후원자의 삶도 풍만해진다
수원에서 이비인후과를 개업하고 있는 의사 김주일(51)씨에게는 원장말고 직함이 하나 더 있다. 갤러리 그림시 관장. 그림과는 인연이 없던 그가 갤러리의 관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얻게 된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붙어지내던 친구인 화가 최문호씨 때문이다.
대자본만 후원하란 법 있나
“독일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돌아와 수원에 정착한 문호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역작가들이 얼마나 힘들게 분투하고 있는지 알게 됐죠.” 최씨의 그림을 간간이 사면서 작업 여건의 열악함을 지켜보던 김씨는 최씨의 “꾐에 넘어가” 함께 94년 갤러리 그림시를 열었다. 발표기회를 얻기 힘든 젊은 지역작가들에게 전시의 장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운영비의 절반 이상이 그의 주머니에서 나가긴 했지만 수원지역에서 개업한 동료와 자영업을 하는 지기 34명을 모아 후원회도 조직했다. 친구 최씨와 큐레이터 이섭씨, 00대학교 이석기 교수 등의 도움을 받으면서 갤러리 그림시는 지난해까지 매년 수원과 인근지역 대학 졸업생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젊은 작가전’, 지역작가전, 수원·화성 아트쇼, 그림시 거리전시회 등 지역작가를 알리는 꾸준한 전시기획을 해왔다.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전시라 판매를 해도 잘 팔리지 않죠. 그래서 한두점씩 사 후원회원들에게 선물하기도 하면서 모은 작품이 벌써 500점이 넘었어요.”
매주 또는 매달 바뀌는 전시를 관리하면서 김씨뿐 아니라 선물받은 작품들을 병원 대기실에 걸어놓고 7년 동안 “강제로” 미술작품을 감상해온 후원회원들도 미술을 보는 안목이 슬그머니 생겨났다. “몇년 전에 문호 소개로 젊은 작가 한 사람을 만났어요. 아직 작품이 설익기는 했지만 치열하게 작업을 하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워서 개인전을 두번 마련했습니다. 전시가 자극이 됐는지 더 열심히 매달리더니 지난해 광주 국제비엔날레 본전에 올라갔어요. 그럴 때 제일 보람이 크지요.”
갤러리 그림시는 올해 잠정적으로 문을 닫았다. 버는 돈의 대부분을 쏟아부어야 하는 경제적 부담도 적지 않았지만 근래 시에서 운영하는 전시관이 몇개 생겨나면서 지역작가들의 전시 기회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김씨를 꼬셨던 최씨는 이참에 그만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그는 관장이라는 폼나는 직함을 버리는 대신 전국 지역작가를 대상으로 본격적인 후원작업에 착수했다. 올해부터는 지방을 다니면서 고생하는 지역작가들에게 발표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벌써 올해 말까지 대구, 광주 등에서 3차에 걸친 ‘젊은 작가 발굴전’이 기획돼 있고, 9월에는 중국 청두에서 ‘한국현대작가전’을 열 예정이다. “가능성 있는 작가를 찾아서 세상에 내보여주고 싶은 게 제 바람입니다. 나중에 여건이 되면 집에 쌓여 있는 작품들도 기증하고 싶고요.”
후원이라고 하면 공연이나 전시 포스터 아래에 적혀 있는 대기업이나 언론사, 지자체를 떠올리기 쉽지만 김씨처럼 개인의 시간과 돈을 투자해가며 드러나지 않게 예술가들의 디딤돌이 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 개인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세계적인 미술관 구겐하임도 있듯 서구에서는 개인후원이 기업후원 못지않게 일반적인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 후원은 오랫동안 대자본을 가진 집단이나 관의 전유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예술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어려운 여건에서 분투하는 예술가에 대한 개인후원이 소리없이 늘어나고 있다.
돈이 안 되면 몸으로라도…
이런 현상 중 요즘 가장 눈에 띄는 분야는 춤판이다. 오랫동안 대중에게 외면당하면서 대학 위주로 진행된 춤판에서 대학이나 관에 연고가 없는 직업무용단은 존립 자체에 위협을 느끼며 활동해왔다. 98년부터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활동해온 안은미씨의 무용단 안스안스도 하루하루가 불안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99년 안씨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안스안스 후원회가 발족되면서 안씨의 얼굴에는 수심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이게 될까, 다들 먹고 살기 바쁜데 누가 나설까 의심했는데 후원회원들이 다들 너무나 애를 써주시니까 되더라고요.”
회사원, 음악가, 주부 등 다양한 곳에서 생업을 가지고 있는 50여명으로 구성된 안스안스 후원회는 일년에 한번씩 새 작품을 올리기 전에 후원인의 밤을 연다. 돈을 걷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티켓을 수십장씩 가져가서 직접 팔아주기도 한다. 몇몇 회원들은 연습장을 쫓아다니며 자질구레한 잡일까지 도맡아 한다. 얼마 전 미술대학에 다니는 대학생 하나는 자신은 돈이 없으니 일을 도와주겠다면서 찾아와, 오는 4월12일 LG아트센터에서 발표하는 ‘은하철도000’의 공연준비 전 과정에서 잔심부름 등 궂은 일을 도맡아해 안씨의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돈으로 따지면 기업들이 선심 쓰듯 한번 내놓은 액수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의 마음이 바로 후원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작은 애정들이 없으면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죠.” 안씨는 바쁜 연습 속에서도 틈틈이 직접 제작한 소식지를 만들어 후원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무용기획사 MCT의 장승헌 대표는 “개인의 작은 후원들이 예술가들에게 주는 정신적인 도움은 대기업의 재정적 지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또한 이런 움직임은 “초대권 남발 문화를 줄이고 유료관객 확보를 통해 순수예술의 실질적인 대중화에 이바지하기 때문에 예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안씨뿐 아니라 지난 2월 출범한 한국무용단 김매자 창무예술원의 후원회를 비롯해 서울발레시어터, 현대무용가 홍신자씨,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프리마돈나 강수진씨, 국립발레단 대표무용수 이원국씨도 개인후원회를 가지고 있다. 지난해 리옹 댄스비엔날레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도약한 홍승엽씨도 후원회 결성이 진행중이다. 아직 후원문화가 낯선 우리나라에서 개인들의 관심과 애정만으로 모이는 후원회는 안정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없지는 않다. 오래 전 결성됐지만 지금은 사실상 활동이 없는 홍신자씨 후원회 역시 여러 번 헤쳐모여를 반복했다. “우리가 돕자며 후원회 분들이 나섰다가 깨지고, 뭉쳤다 깨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지요. 후원문화가 자리잡지 못한 우리 예술계 풍토에서 지속적으로 후원회가 운영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홍씨는 아쉬움을 털어놓기도 한다.
미술과 춤 등 대중성을 얻기 쉽지 않은 분야에서 개인들의 후원활동은 빛을 발한다. 일반적으로 가장 대중적인 문화판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계에서도 독립영화 제작단체나 시네마테크 같은 언더그라운드 영화계는 개인들의 따뜻한 손길에 크게 의존한다. 시네마테크가 뭔지도 알려지지 않았던 91년 차선의 시네마테크인 비디오테크로 탄생돼 지금까지 영화에 목마른 젊은이들에게 단비 역할을 했던 문화학교 서울도 한 사람의 후원자가 없었으면 일찌감치 간판을 내려야 했을 터이다. 서울 사당동의 상가건물 3층에 위치한 문화학교 서울의 바로 아래층, 혜민국한의원의 최정곤(48) 원장이 이 단체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하는 게 없어서 별로 할말도 없는데요.” 최씨는 이렇게 말하지만 그는 10년 동안 한달에 100만원이 넘는 문화학교 서울의 임대료를 한번도 거르지 않고 내왔다. 뿐만 아니라 비영리 조직으로 적자에 허덕이는 이 단체가 S.O.S를 청할 때마다 흔쾌히 백기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문화학교 서울의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80년대부터 8mm 소형영화작가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아마추어로 영화만들기를 해왔어요. 그때 함께하던 친구들이 의기투합해서 영화를 보여주는 공간부터 만들어보자고 해서 시작된 게 문화학교 서울이었죠.” 대표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최씨는 이 단체의 운영이나 행사 기획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는다. 시간있을 때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찾아가 젊은 친구들과 함께 영화보고 밥먹으며 어울리는 게 전부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걸, 능력있고 젊은 친구들이 나서주니까 제가 고마울 따름이지요”라고 말하는 최씨는 “내가 지는 경제적 부담보다 운영진들이 재정문제로 힘들어하는 걸 볼 때가 더 힘들다”고 한다.
홍익대 미대생들의 영원한 스폰서, 호미화방
최씨는 문화학교 서울에서 활동하거나 자주 나타나던 친구들이 독립영화협회나 인디포럼을 만들어서, 아직 어렵지만 자리잡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더없이 기쁘다고 한다. “이곳을 만들 때 처음 세웠던 목표가 조금씩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문화학교 서울이 아니라도 독립영화들이 디딜 수 있는 언덕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최씨의 경우처럼 단체나 개인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재정적 지원은 후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안스안스 연습실에 궂은 일을 하며 재정적 지원 못지않은 후원을 한 여대생의 예처럼 후원의 방식은 다양하다. 대를 이어 25년째 홍익대 앞에서 화방을 경영하는 호미화방의 조석현 대표는 홍대 미대생들이 첫손가락에 꼽는 후원자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뭉칫돈을 쥐어준 적이 없다.
“화방에 들어와서 물감이나 붓을 만지작거리는 표정을 보면 딱 알죠. 저 사람이 사겠구나, 아니면 가격표를 보고 돌아서겠구나.” 돈이 없어 돌아서는 대학생들에게 조씨는 “나중에 돈벌면 갚아요”하고 말하며 붓 한 자루를 선사하기도 하고 가난한 작가에게는 “이 물감이 새로 나왔는데 한번 써보세요”하며 슬쩍 안긴다. 돈을 계산하면서 주지는 않지만 따져보면 한번에 40만∼50만원 어치의 화구를 안긴 적도 여러 번이다. 고맙다고 나중에 작품을 들고 오는 젊은이들도 여러 명 있지만 절대로 받지 않는다. 기능적인 도구와 작가에게 자식과도 같은 작품이 교환될 수 없다는 게 그의 철칙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를 도와줬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사장님 그때 너무 잘썼어요” 말해야 그랬구나, 기억할 뿐이다. 가게 한귀퉁이에 작은 테이블과 커피믹스를 쟁여놓고 학생들이 쉬면서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장소까지 마련해 놓았으니 홍대생들이 도록이나 학술지를 만들 때마다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리는 스폰서가 되는 것도 당연하다. “작은 돈이지만 거절 못하지요. 그렇지만 아예 정기적인 재정 지원을 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사양합니다. 그런 도움은 자칫 작가를 나태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미술계의 발전 같은 무슨 거창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오랫동안 쌓인 정이죠”라고 말하는 조씨는 내세울 만한 일이 아니라고 취재도 여러 번 고사했다. 그래도 “일전에 교수님이 와서는, 공모전 준비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마지막 작업에 호미화방 제품을 쓰면 상받는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씀하시대요. 실제로 수상한 친구가 와서 여기 물건 써서 1등했다고 말하면 기분 좋지요”라며 흐뭇함을 숨기지는 않는다. “작가 초년병들이 열심히 작업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선의가 충분히 되돌아온다”고 하는 김씨의 말마따나 후원자들은 단지 일방적인 시혜자가 아니다. 그들은 더 훌륭한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삶이 더욱 풍만해지는 보상을 받는다. 그리고 때로는 후원활동이 삶의 더 큰 부분을 바꿔놓기도 한다.
푸른 영상을 지켜준 ‘푸른 후원’
97년부터 독립영화집단 푸른 영상의 ‘푸른 회원’이 된 류근혜씨는 후원으로 인생의 목표가 바뀌었다. 학원강사인 류씨는 그해 다니던 방송 아카데미에서 단체로 일본 야마가타다큐영화제에 갔다가 독립영화 감독 김태일씨를 우연히 만나면서 푸른 영상과 인연을 맺게 됐다. 영화를 보러 해외에 나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류씨는 영화에 대해서 “평균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아카데미의 숙제 때문에 김태일씨를 찾아간 류씨는 “사무실이 너무 불쌍해 보여서” 후원회에 가입했다. 다음해부터 후원회 소식지를 만들면서 푸른 영상 사람들과 거의 한솥밥을 먹는 식구가 됐다. 영화제작 워크숍에도 몇번 참가하면서 그는 진로를 영화로 바꿨다. 99년 자신이 만든 데모 테이프를 일본의 한 영화전문학교에 보내 장학생 제안까지 받고도 집안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져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언젠가는 재도전할 생각이다. “잘하는 분들이 너무 많으니까 감독이 될 생각은 없고요, 저는 독립영화의 해외배급망을 뚫는 일을 하고 싶어요. 다큐영화제라고 해도 외국은 배급자들이 따라와서 감독들의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는데 모든 걸 다 혼자 챙기는 우리 감독들을 보니까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미국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러가면 나눠주는 팸플릿에는 기업들과 함께 극단의 후원을 해주는 사람들의 이름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미국 뮤지컬이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성장한 연유에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 같은 천재작가뿐 아니라 이런 후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작품들은 역시 후져”라고 단정하기 전에 자신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류 작품, 2류 문화 뒤에는 언제나 2류 관객이 있게 마련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갤러리 그림시를 만들어 지역작가를 후원하는 김주일 원장.

사진/무용가 안은미씨의 후원회는 매년 한번씩 새 작품을 선보일 때마다 후원의 밤을 연다.(이정용 기자)

사진/문화학교 서울의 후원자 최정운(오른쪽)씨. 그는 시간날 때마다 문화학교 서울에 들러 운영진들과 토론하고 함께 영화도 본다.(이정용 기자)

사진/호미화방의 조석현 대표는 벌써 20년째 홍대생들의 믿음직한 후원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