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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기괴한 형상, 민중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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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4-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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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에게 몰취향으로 몰렸던 고대와 중세의 희극정신, <풍자예술의 역사>

사진/자크 안토니 쇼반의 <의사>. 예나 지금이나 풍자와 해학의 정서는 변함없는 예술의 소개임을 알려준다.
아시리아인과 이집트인은 희극성을 알고 있었을까?

프랑스의 작가 샹 플뢰리(1821∼1869)의 <풍자예술의 역사>는 이 물음으로 시작한다. 일찍이 헤겔은 오리엔트 예술의 정신이 거대한 건축물을 통해 드러나는 “숭고함”에 있다고 한 바 있다. 죽은 파라오를 기리는 숭고한 문화 속에도 웃음은 있었을까? 물론 거대한 돌덩어리로 된 파라오의 숭고함 속에서 웃음의 자취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웃음 없는 사회란 있을 수 없기에 파피루스로 된 민중의 소박함 속에는 종교와 왕권을 조롱하는 풍자화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이집트의 민중도 술 먹고 토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릴 줄 알았고, 이 소박하고 건강한 웃음의 정신을 ‘베스’라는 신의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기렸다.

파라오에도 웃음의 자취가 있었을까


사진/프랑스 오텅 생 라자르 성당의 부조. 영혼의 저울질 하는 모습이다. 기괴한 형상들은 당시 민중의 해학과 풍자정신을 보여준다.
그리스인들은? 우리는 그들이 희극이라는 장르를 만들었으며, 그것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고찰하기까지 했음을 알고 있다. 가령 소크라테스를 풍자한 아리스토파네스와 <시학>의 2부로 희극론을 쓴 아리스토텔레스를 생각해보라. 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그리스 예술의 정신은 대리석 조각을 통해 드러나는 유기적인 “아름다움”에 있었다. 그런데 미적 범주의 표 속에서 ‘희극성’은 ‘추’에 가깝기에 그리스 조각에서도 희극성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그 시기에도 인간을 우습게 묘사하는 파우손과 같은 고약한 풍자화가가 있었으나, 희극의 의의를 평가할 줄 알았던 아리스토텔레스도 파우손의 풍자정신은 몰취향으로 보고 거기에 적대감을 표출했다.

중세인들은? 우리는 성스러운 중세 성당의 한쪽 구석엔 온갖 우스꽝스런 형상이 버젓이 조각되어 있음을 안다. 가령 므와삭의 생 피에르 수도원의 기둥을 보고 성 베르나르가 늘어놓은 비난은 이미 미술사의 고전적 인용의 대상이 되었다. “수도원 경내에 형제의 눈앞에 또 그들이 경건히 독서하는 동안, 이 어리석은 괴물들, 이 아름다운 왜곡이니 기형미의 극치가 무슨 소용이 있겠소?(…) 여기를 보면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여럿이 붙었소. 그런데 저기를 보면 몸통 하나에 머리가 여럿이요. 네발 짐승이 뱀꼬리를 하고 있는가 하면 네발 짐승의 머리가 물고기 머리 위에 붙어 있지를 않겠소….”

이번에 번역된 <풍자예술의 원리>는 원작 가운데에서 ‘고대와 중세’편만 다루고 있지만, 기괴한 형상의 역사는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고대의 난쟁이 피그미족, 그릴레스, 키메라, 중세의 ‘악마’, ‘죽음의 춤’, ‘여우’에 이어, 르네상스에 접어들면 당장 떠오르는 것이 온갖 기괴한 형상으로 가득 찬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이다.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내는 페터 브뤼겔의 풍속화도 빼놓을 수 없다. 문학에서는 그 유명한 에라스무스의 <광우예찬>,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던 세바스천 브란트의 <바보들의 배>가 있다. 이 북구인들에 앞서 일찍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의 스케치를 남긴 바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희극성’이 아니라 ‘그로테스크’라 불리는 형상들의 역사다. 이 섬세한 차이가 일찍부터 의식되고 있었음은 희극론을 썼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작 패러디 작가인 니코카레스와 풍자화가인 파우손에게 경멸을 퍼부은 데에서 잘 드러난다. 니체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희극성’이 디오니소스적 충동을 아폴론적으로 가공한 다분히 문명적 현상이라면, ‘그로테스크’는 디오니소스적 충동의 즉자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게다. 한마디로 ‘그로테스크’는 보통 희극보다 원초적인 현상, 희극이 발생하는 토대가 된 ‘원(原)희극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못생긴 얼굴은 실물?

사진/베스신을 새긴 조각품.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건강함 웃음을 정신을 이 신으로 형상화했다.(위) 페터 브뤼겔의 <장님을 이끌고 있는 장님에 대한 우화>. 브뤼겔은 우화를 소재로 한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아래)
책의 대부분을 저자는 이 기괴한 형상들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는 당대의 “상징주의” 미술사가들의 견해를 반박하는 데에 사용한다.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상징주의적 해석은 성스런 교회에 버젓이 자리잡은 이 남세스런 형상들에 심오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 형상들을 굳이 기독교 신학과 화해시키려고 한다. 예를 들어 거대한 달팽이에 화살을 쏘는 사람의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맨 처음 죽음의 고통을 겪은 자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이 기괴한 형상들 속에서 비의적 의미를 찾는 가톨릭 교회의 상징주의는 한갓 신학적 편견에 불과하다. “석공들의 예술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그것은 무의식적이며 순진한 예술이고 공중 앞에서 윗도리를 들어올리는 어린아이처럼 무구하다.”

이 신학적 농담과 함께 작가가 반박하는 또 하나의 견해는 독일 학자들의 철학적 농담들이다. 원본 텍스트에서 빠진 방점 하나에 관해 “800페이지의 책”을 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독일인들은 희극성을 규정하는 데에서도 그 사변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유한 속의 절대적 포로상태로부터의 해방”, “무한한 삶에 대한 부정”, “그 자신의 부정을 통해 다시 태어난 미”, “그 자신과 모순되게 된 주관성” 등등. 이에 대해 “책보다는 그림, 인쇄보다는 회화에서 더 깊은 인상”을 받는다고 자기를 소개한 저자에게는 “가면 하나가 수많은 논문들, 해설들, 텅 빈 울림과 독일 형이상학의 공허한 단어들보다 훨씬 더 희극성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작가의 역량이 드러나는 곳은 역시 구체적인 논증. 가령 우리에게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못생긴 얼굴이 실은 실레노스나 바쿠스의 상이라는 주장을, 저자는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알키비아데스의 말을 들어 반박한다. “소크라테스는 입상들의 공방에 전시된 실레노스와 너무 닮았다.” 한마디로 조각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못생긴 얼굴은 실물의 초상이라는 것이다. 성당의 기괴한 형상들에 비의적 의미를 부여하는 가톨릭 교회의 상징주의에 대해서도 저자는 위에 인용한 성 베르나르의 편지를 들어 반박한다. 교회에서 그 남세스런 형상에 애초에 심오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면 왜 신학자나 성직자들이 그 형상들에 그토록 심하게 반발을 했겠냐는 것이다.

150년 전에 쓰여졌다는 시대적 한계, 이론을 정리되지 않은 사실의 나열, 깔끔하지 못한 번역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대중적 교양은 물론이고 미학과 예술사의 기초자료로서 유용한 책이다. 기괴한 형상들을 통해 민중의 숨결을 느껴보려고 이 책을 썼다는 저자는 풍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풍자화란 다수의 손에서는 비열하다. 그 쓴맛은 그것이 소수를 위해 싸울 때에 제거된다.” 여기서 “소수”란 물론 실제로는 다수이나 늘 사회적 소수로 지내야 하는 민중이라는 이름의 난쟁이들을 가리킬 게다.

진중권/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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