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기억을 날카롭고 치명적으로 그려낸 배수아의 <부주의한 사랑>
▣ 태풍클럽 출판사 편집자
얼마 전, 누군가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청소년 문학잡지에 종종 응모하곤 하는 글재주 있는 어느 고등학생이 있는데, 유독 가난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가난한 이야기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그 친구는 꽤나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지만, 문학을 하려면 왠지 ‘가난’과 친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늘 그런 이야기만 쓴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문학, 특히나 한국 문학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가난과 친분이 두텁다. 종류도 다양해서, 황석영의 냉정한 리얼리즘에서부터 오정희의 섬뜩한 직관, 신경숙의 낭만적 서정에서 박민규의 뒤틀린 재담에 이르기까지 빈곤을 배경으로 한 서사는 차고도 넘쳐난다. 그렇다 보니 칙칙하다는 이유로 한국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이들도 제법 많이 보았다. 그런데, 가난은 배경이 되기는 쉬우나 본격적인 주제가 되기는 어려운 소재다. 결핍은 여전히 극복해야 할 대상이며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적인 소설에서조차 가난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작품은 의외로 많지 않다. 누군가가 가난해져서 불쌍했다거나, 가난했지만 우리는 마음이 따뜻했다거나, 혹은 삶의 고단함을 자연주의적으로 하나하나 써내려간 이야기는 많지만, 정작 결핍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끈질기게 응시한 작품은 드물다는 이야기다. 소설을 읽으며 처음으로 ‘내 가난’의 기억을 가장 생생하게 떠올리게 만든 작품은 배수아의 <부주의한 사랑>이었다. 배수아는 초기에는 이미지즘과 신세대 풍속도를 내세운 작가로 규정되었으나, <바람 인형> <부주의한 사랑> 등으로 시작되는 중기작들을 읽으면 작가의 초점이 사뭇 반대임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에서 결핍은 하나의 이미지로 응집된다. ‘나쁜 피.’ 나이 많은 어머니와 누군지 알 수 없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연연은 곧 이모 부부에게 넘겨진다. 길러준 이모의 가정 역시 비극적으로 해체되자 연연은 다시 부유한 양부모의 집에 입양되어 처음으로 안정을 찾게 된다. 연연을 양부모에게 넘기는 외삼촌은 거듭 아이에게 ‘나쁜 피’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정말로 나쁜 피를 지니고 있다. ‘나쁜 것은, 매력적이고 진지하고 치열하고 강하다. 그리고 그런 병은 절대 낫지 않는’다. 두려운 것은, 가난한 일상이 아니라 다시 가난으로 버려지지는 않을까, 현재의 평온이 빌려 입은 옷처럼 혹시 가짜가 아닐까 하는 자각이다. ‘깊은 밤에 잠에서 깨어나도 더 이상 가슴이 두근거리는 공포가 없다. 누구인가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밟으면서 내려가고 있지도 않고 (…) 병을 앓고 있는 아이도 없다.’ 하지만 이미 유년의 결핍과 빈곤으로 상처 입은 주인공은 현재에 안주하지 못한다. 과거의 기억은 어른들로부터 버려져 굶어죽은 자매의 유령처럼 끊임없이 출몰한다. 그리고 상처를 안은 인물들은 어쩔 수 없이 자기 파괴적이면서도 생생한 ‘부주의한 사랑’에 빠져든다. 6·25를 직접 겪지는 않았으나 살풍경한 재건의 풍경 속에서 그것을 간접 체험했을 60년대생 배수아는 그런 과거를 리얼한 방식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이모를 ‘어머니의 언니’로 기술하는 특유의 낯선 호칭들처럼, 바람에 삐걱대는 목조가옥과 판자촌, 마당에 매달린 흰 그네, 프랑스인의 탁아소 등 과거의 공간들은 이질적이고 낯설지만, 그것이 환기하는 정서는 결코 타인의 것이 아니다. 비약의 80년대와 자본주의의 세련화가 진행된 90년대를 견뎌내면서 성공적으로 봉합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누구나 하나쯤은 안고 있는 빈곤의 기억을 이만큼 날카롭고 치명적으로 그려낸 작가를 아직도 나는 만나지 못했다. 배수아는 나에게, 흑백사진 속 유년의 기억이 세피아톤의 아련한 클리셰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심연과 같이 깊은 현재와 미래의 상처임을 진심으로 말해준 작가이기 때문이다.

(사진/ 한겨레 김봉규 기자)
확실히 문학, 특히나 한국 문학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가난과 친분이 두텁다. 종류도 다양해서, 황석영의 냉정한 리얼리즘에서부터 오정희의 섬뜩한 직관, 신경숙의 낭만적 서정에서 박민규의 뒤틀린 재담에 이르기까지 빈곤을 배경으로 한 서사는 차고도 넘쳐난다. 그렇다 보니 칙칙하다는 이유로 한국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이들도 제법 많이 보았다. 그런데, 가난은 배경이 되기는 쉬우나 본격적인 주제가 되기는 어려운 소재다. 결핍은 여전히 극복해야 할 대상이며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적인 소설에서조차 가난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작품은 의외로 많지 않다. 누군가가 가난해져서 불쌍했다거나, 가난했지만 우리는 마음이 따뜻했다거나, 혹은 삶의 고단함을 자연주의적으로 하나하나 써내려간 이야기는 많지만, 정작 결핍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끈질기게 응시한 작품은 드물다는 이야기다. 소설을 읽으며 처음으로 ‘내 가난’의 기억을 가장 생생하게 떠올리게 만든 작품은 배수아의 <부주의한 사랑>이었다. 배수아는 초기에는 이미지즘과 신세대 풍속도를 내세운 작가로 규정되었으나, <바람 인형> <부주의한 사랑> 등으로 시작되는 중기작들을 읽으면 작가의 초점이 사뭇 반대임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에서 결핍은 하나의 이미지로 응집된다. ‘나쁜 피.’ 나이 많은 어머니와 누군지 알 수 없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연연은 곧 이모 부부에게 넘겨진다. 길러준 이모의 가정 역시 비극적으로 해체되자 연연은 다시 부유한 양부모의 집에 입양되어 처음으로 안정을 찾게 된다. 연연을 양부모에게 넘기는 외삼촌은 거듭 아이에게 ‘나쁜 피’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정말로 나쁜 피를 지니고 있다. ‘나쁜 것은, 매력적이고 진지하고 치열하고 강하다. 그리고 그런 병은 절대 낫지 않는’다. 두려운 것은, 가난한 일상이 아니라 다시 가난으로 버려지지는 않을까, 현재의 평온이 빌려 입은 옷처럼 혹시 가짜가 아닐까 하는 자각이다. ‘깊은 밤에 잠에서 깨어나도 더 이상 가슴이 두근거리는 공포가 없다. 누구인가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밟으면서 내려가고 있지도 않고 (…) 병을 앓고 있는 아이도 없다.’ 하지만 이미 유년의 결핍과 빈곤으로 상처 입은 주인공은 현재에 안주하지 못한다. 과거의 기억은 어른들로부터 버려져 굶어죽은 자매의 유령처럼 끊임없이 출몰한다. 그리고 상처를 안은 인물들은 어쩔 수 없이 자기 파괴적이면서도 생생한 ‘부주의한 사랑’에 빠져든다. 6·25를 직접 겪지는 않았으나 살풍경한 재건의 풍경 속에서 그것을 간접 체험했을 60년대생 배수아는 그런 과거를 리얼한 방식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이모를 ‘어머니의 언니’로 기술하는 특유의 낯선 호칭들처럼, 바람에 삐걱대는 목조가옥과 판자촌, 마당에 매달린 흰 그네, 프랑스인의 탁아소 등 과거의 공간들은 이질적이고 낯설지만, 그것이 환기하는 정서는 결코 타인의 것이 아니다. 비약의 80년대와 자본주의의 세련화가 진행된 90년대를 견뎌내면서 성공적으로 봉합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누구나 하나쯤은 안고 있는 빈곤의 기억을 이만큼 날카롭고 치명적으로 그려낸 작가를 아직도 나는 만나지 못했다. 배수아는 나에게, 흑백사진 속 유년의 기억이 세피아톤의 아련한 클리셰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심연과 같이 깊은 현재와 미래의 상처임을 진심으로 말해준 작가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