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눈밖에 나고, 제 페이스 못찾고… 일본 프로야구서 죽쑤고 있는 선수들
단순 무식하게 생각해 보기. 천하의 선동렬(현 한국야구위원회 홍보위원, 전 주니치 드래건스)도 한참 고생했다. 선동렬이 어떤 투수였는가. 한국 프로야구 20년사에서 ‘불세출’이라는 단어는 오직 그에게만 붙여졌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지금 일본 프로야구서 활약중인 선수들은 모두 선동렬보다 아래로 평가받았다. 그러니 그들이 부진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페이스 좋아도 출전 불투명한 사연
이런 식으로 대책없는 낙관론은 잠시 뒤 크나큰 절망을 몰고 온다. 앞으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제 활약을 하려면 적어도 선동렬 이상의 선수가 탄생해야 한다는 결론 아닌가. 쓸 만한 유망주들의 미국야구 진출로 갑작스레 빈곤해진 국내 프로야구에서 이제 ‘제2의 선동렬 신화’를 기대하기란 어려워진 것일까.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중인 한국프로 출신 스타들이 모조리 생존경쟁에서 탈락할 위기다. 최고 인기구단 요미우리에 모여 있는 조성민, 정민태, 정민철 등 이른바 ‘요미우리 3총사’는 사실상 2군이 확정됐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나마 일본 프로 무대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응하리라 예상했던 구대성(오릭스)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있다. 일본 진출 3년째를 맞고 있는 주니치 이종범은 올 초반에도 외국인 선수와의 경쟁으로 1군 엔트리 진입 여부를 놓고 마음을 졸이다가 그나마 겨우 개막 엔트리 합류가 결정됐다. 그러나 이마저도 초반 호시노 주니치 감독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1군에 살아 남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남한에서 야구 제일 잘한다’던 선수들이 성공은커녕 생존 여부조차 기약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괘씸죄가 크다?. 정민철과 이종범이 이에 해당한다. 괘씸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본 프로야구에서의 감독이 차지하는 위치를 잠깐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정민철이 속해 있는 요미우리의 나가시마 감독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천황 다음에 나가시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 매년 1월1일 스포츠신문의 1면은 그의 얼굴로 도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요미우리 캠프서 그가 현역 시절 달던 백넘버 ‘3’의 복귀식이 열리자 수천명의 팬들이 몰려든 것은 새삼 인기를 실감케 한 예이다. 이보다 덜 하지만 주니치의 호시노 감독도 마찬가지다. 야구를 하는 선수들은 감독의 뜻을 실천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감독들이 이렇게 대우받는 풍토에서 정민철은 말하자면 ‘개겼다’고 일본에서는 받아들인 것이다. 나가시마의 방침에 반기를 들었다고 본 것이다. 정민철은 올 초 스프링캠프에 들어가며 “나가시마 감독은 내 스타일을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는 투의 발언을 했는데 이것이 현지 언론에서는 ‘정민철, 기용 방법에 불만’이라는 큼지막한 제목으로 신문에 깔렸다. 여기에 덧붙여 갑작스레 “내년 시즌에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겠다”고 발표해 기름을 끼얹었다. 요미우리가 이를 달가워할 리가 없었고 이는 2군행으로 이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민철의 시범 잔여경기 일정이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1군행이 어렵다는 얘기는 이 때문이다. 자신의 뜻과 달리 보도된 탓에 실상 정민철은 억울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진출 첫해였던 지난해 훈련 부족으로 다소 페이스가 늦춰졌지만 올해는 다르기 때문이다. 직구 최고 구속이 146km까지 나오는 등(지난해에는 140이 채 되지 않았다) 공끝이 좋을뿐더러 상-하체의 밸런스가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기회가 그다지 주어지지지 않고 있다.
이종범은 지난해 가을캠프에 참가하지 않아 호시노 감독의 분노를 샀다. 이종범은 “다른 외국인 선수가 시즌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데 내가 참석할 이유는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호시노 감독은 캠프 종료 즈음 일본 주간지 <슈칸 베이스볼>(주간야구)과의 인터뷰에서 이종범을 대놓고 비난해 한동안 분위기가 냉랭해진 적이 있다. 최근 이종범의 1군 합류도 한시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새로운 용병으로 들여온 언로가 시범경기 내내 한개의 안타도 때려내지 못해 이를 보다 못한 주니치 코칭스태프가 이종범과 자리바꿈을 지시했다. 언로의 타격 밸런스가 돌아온다면, 그리고 이종범이 시즌 초반 부진하다면 역시 운명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쿠세 야구’에 안이한 대응
조성민은 정말 이상한 케이스다. 당초 요미우리 삼총사 가운데 1군 잔류 확률이 가장 높았으나 지난 16일 주니치전서 ⅔이닝 동안 무려 7실점 하는 저조한 기록을 보이더니 2군으로 가라앉았다. 갑자기 난조를 보인 것이다. 목 뒤쪽 근육통이 한 차례 오더니 하체를 이용해 던지지 못하고 있다. 지난 99년 요미우리의 마무리 투수를 하다 부상으로 재활 훈련을 해왔던 조성민은 올 시즌 다시 마무리 보직을 맡을 것으로 기대됐고 실제로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지난해 마무리를 맡았던 왼손 오카지마가 페이스 회복이 더뎠고 신인 미우라는 경험 부족으로 실격 판정을 내린 상태. 따라서 기회는 어느 때보다 눈앞에 있는 듯했다. 그러나 조성민의 부진이 장기화되자 요미우리는 최근 마무리 투수로 용병의 추가 영입 방침을 발표했다. 재기의 꿈이 당분간 물거품이 된 것.
현대와 요미우리의 2년간 밀약 속에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은 정민태 또한 초반 스포트라이트는 온데간데 없다. 정민태는 캠프 합류 뒤 일찌감치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국내와 달리 일본은 캠프에서 사실상 시즌 준비를 마치고 시범경기 때는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점 등을 누누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었다. 두차례의 목통증이 왔고 이후 홍백전과 시범경기서 특유의 제구력과 볼끝은 사라져버렸다.
정민태와 달리 느긋하게 캠프를 진행한 구대성은 최근 상하체의 밸런스가 깨지면서 릴리스 포인트를 찾지 못하고 있다. 특유의 만만디 근성을 보유한 ‘포커페이스’의 구대성이지만 이것도 한국에서나 가능하다. 첫해 실패한 뒤 복구하기까지는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가 필요하다. 선동렬이 이미 잘 증명해내지 않았는가. 선동렬은 일본 진출 첫해 부진한 뒤 동료들의 눈빛을 볼 때마다 하루에도 몇번씩 짐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보통 캠프에서 던져야 하는 공은 약 1500개. 구대성은 약 600개를 던졌다. 조바심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요미우리 삼총사 등이 부진하자 요미우리 관계자는 사석에서 “앞으로 한국 선수들의 수입은 고려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까지 말했다. 한국 프로야구의 용병 수입사에서도 입증됐지만 야구야말로 풍토를 타는 경기다. ‘적응’이라는 화두가 이처럼 중요한 종목은 없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금세 판단을 내린 요미우리 관계자도 문제지만 이들의 부진은 새삼 다른 나라 야구에의 적응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케 한다. 부진의 근본적인 원인을 굳이 들자면 한-미-일 야구 풍토 중 그 어디보다도 가장 ‘쿠세(버릇) 야구’(상대의 독특한 투구폼이나 타격자세 등을 간파, 작전과 전술에 사용)에 정통한 일본야구에 한국 선수들이 너무 안이하게 접근했다는 점, 또 가장 많이 지적되는 음식과 언어 등의 문제점이 그것이다. 이는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다.
이젠 정면승부밖에 없다!
냉정히 판단해보면 이들이 못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 주니치가 이종범을 영입했을 때는 다른 일본 선수들과 견주어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실력만을 바란 것이 아니다. 주니치는 그야말로 용병을 원한 것이다. 홈런 30개 이상씩 때려내 홈런왕 경쟁도 하고, 타격 랭킹 5걸 안에 들어가 다른 투수들의 견제 대상이 되는, 그런 외국인 선수 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언제든지 교체 가능하고, 조금이라도 팀과 융화하지 않거나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바로 ‘반품 처리’가 가능한 선수에 다름 아니다.
현재로선 2001시즌 전반기는 일본서 활약중인 한국 선수들의 활약상에 커다란 약진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도 아무때나 쓰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겐 원천적으로 적은 기회가 주어지는 용병 아닌가. ‘돌아가자, 도망치자’는 마음을 몇백번 억누르고 정면승부를 하는 수밖에 없다. 5년 전의 선동렬이 신칸센 열차에서 눈물젖은 도시락을 먹으며 다짐했듯이 그들은 마음속의 분노를 실력으로 환원하는 수밖에 없다.
김성원/ 스포츠투데이 야구부 기자 rough@spportstoday.co.kr

사진/정민철은 올해 좋은 페이스를 찾았지만 몇개의 발언이 물의를 일으키며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나가시마 감독의 눈 밖에 났다.(연합)
페이스 좋아도 출전 불투명한 사연

사진/가을 캠프에 참가하지 않아 호시노 감독의 분노를 산 이종범. 1군 잔류 가능성은 아직도 물음표에 묶여 있다.(연합)

사진/정민태는 일찌감치 페이스를 끌어올린 게 화근이 됐다. 두 차례의 목통증으로 제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연합)

사진/조성민은 애초 요미우리 삼총사 가운데 1군 잔류 확률이 가장 높았으나 지난 16일 주니치전서 갑작스런 난조를 보이며 2군으로 내려앉았다.(연합)

사진/정민태와 달리 느긋하게 캠프를 진행한 구대성도 최근 상하체의 밸런스가 깨지며 흔들이고 있다.(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