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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너무 일찍 꺾인 검은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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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8-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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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힙합문화의 상징 투팩의 짧은 생, 시집으로 다시 만나다

아직도 많은 미국인들은 그가 살아 있다고 믿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나 존 레넌이 아직 살아 있다고 믿는 팬들이 있듯이, 90년대 힙합 전성시대의 정점에 서 있었던 래퍼 투팩 아마루 샤커(1971∼96) 역시 팬들에겐 추앙의 대상으로 남았다.

천재 래퍼로 칭송받았던 그 투팩이 이번엔 음반이 아니라 시집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그가 래퍼로 활동하기 이전인 열아홉살 때 쓴 시를 모은 유고시집 <콘크리트에 핀 장미>(안의정 옮김, 인북스 펴냄)가 출간됐다.

래퍼이던 투팩이 이제 시인으로도 평가받듯이 랩과 시, 얼핏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두 장르는 말로 이뤄진다는 공통점말고도 많은 유사점이 있다. 랩은 ‘플로’(흐름)와 ‘라임’(각운)이 생명. 자유로워진 요즘 시의 원형과 아주 비슷한 것이다. 거기에 자유로운 언어의 분출은 요즘 시의 경향과도 맞아떨어진다. 이미 래퍼 투팩의 시는 미국 버클리대에서 문학교재로 삼고 있을 정도로 시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국 곳곳에 대중가요 노래비가 세워지고 있다. 시인 강은교씨 같은 거물급들도 랩과 시를 접목하는 은유시에 대해 고민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투팩의 시는 이처럼 랩이 문학적으로 인정받는 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래퍼 투팩의 과격한 이미지와 숨겨진 순수성을 함께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투팩의 시는 그야말로 흑인만의 정서를 통해 사회보편의 진리를 추구하는 젊은 청년의 꿈을 담고 있다. ‘콘크리트에 핀 장미’라는 시에서는 ‘그대는 들었는가/ 콘크리트 틈새를 비집고 피어난 장미에 대해// 두발 없이도 걷는 법을 스스로 깨달아/ 자연의 법칙 따위는 엉터리라는 걸 증명하였고(중략) 장미는 꿈을 포기하지 않기에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다네’라며 흑인의 자존과 자립을 노래하기도 하고, ‘정부보조금 혹은 내 영혼’이란 시에서는 ‘미국 정부에 내 영혼을 빼앗길 바에는/ 차라리 굶주리며 거리를 배회하리라’며 직설적으로 흑인을 차별하는 미국사회를 질타하기도 한다. ‘자신의 삶을 존중하고 대중을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자유의 여신상과 정의 여인상의 눈에/ 안경을 씌워주어야 한다’며 흑인을 차별하는 미국사회의 왜곡된 가치관을 조롱하기도 한다.


투팩이란 인물의 의미는 미국 현대사회를 읽는 또다른 독법이기도 하다. 투팩은 무엇보다도 힙합이란 새로운 흐름을 이끌었던 90년대 미국 힙합문화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리고 투팩이란 인물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90년대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대중문화의 주류문화였던 힙합을 이해하는 길일 수도 있다.

투팩은 흑인과격단체인 블랙팬더의 일원이었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슬럼가 다른 청소년들처럼 갱노릇을 하기도 하면서 자라났다.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여덟번이나 체포될 정도로 반사회적이었지만, 20대에 들어서자마자 잘생긴 외모와 탁월한 랩 실력으로 가수 겸 영화배우로 활동하면서 흑인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92년 이후 모두 열두장의 음반을 발표해 이 가운데 9장이 200만장 이상 팔리는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스타가 된 뒤에도 그의 삶은 청소년기처럼 온갖 스캔들과 사건으로 점철됐다. 갱단 출신답게 92년에는 한 소년을 죽인 혐의로 기소당하기도 했고, 93년에는 사복경찰 살해죄로 체포됐다가 나중에 기각처리된 적도 있다. 총격으로 숨지기 이전에도 여러 차례 총격을 받았다. 92년에 백인경찰에 총을 쏜 흑인소년과 94년에 경관을 살해한 또다른 10대가 모두 투팩의 노래에서 범행의 영감을 얻었다고 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댄 퀘일 부통령이 그의 음반을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투팩의 전성기는 불과 5년을 넘기지 못했다. 96년 9월8일 투팩은 라스베이거스에서 타이슨의 권투경기를 보고 나오다 괴한한테 총을 맞아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투팩은 스스로 자신이 서른살 이전에 죽을 것이라고 예견해왔는데 스물일곱에 숨진 것이었다.

갑작스런 죽음은 마치 제임스 딘처럼, 또는 요절한 그룹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처럼 투팩을 더욱 신화적 존재로 만들었다. 스스로는 평생 범죄와 친숙했으면서도 가출 10대들을 위한 사회활동을 하는 등 너무나 모순된 행동으로 가득했던 그의 평소 생활도 그런 신화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아직도 그가 살아 있다고 믿는 팬들의 광적인 반응도 그의 신화를 유지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도 투팩 생존설을 주장하는 인터넷사이트가 70여개나 개설돼 있다.

투팩 생존설을 주장하는 팬들은 투팩이 죽은 바로 다음날 화장됐다는 점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며, 항상 방탄 조끼를 입고 다녔던 그가 사고를 당한 날 방탄 조끼를 입지 않았다는 점도 사망이 조작됐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또 투팩이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는 상태가 심각하지 않았다는 측근의 증언도 투팩이 일부러 죽음으로 자신을 은폐하고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떠났다는 가설을 내세우는 이들의 논거 가운데 하나다. 투팩이 숨지기 직전 만들었던 한 뮤직비디오에서 투팩과 똑 닮은 연기자가 마치 얼마 뒤의 사건처럼 총에 맞아 쓰러진 뒤 부활하는 내용으로 발표된 점도 이런 소문을 부추겼다.

이런 온갖 비상식적인 논란 속에서 그는 아직도 미국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유고시집부터 유고음반까지 그의 이름을 단 문화상품들의 상품성은 고정시장을 확보하고 있다. 그의 많은 미발표 곡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여러장의 투팩 음반들이 기획중에 있고, 투팩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문화상품들의 가치는 약 1500억원 이상일 것으로 미국 음반업계는 보고 있다.

죽음 부르는 ‘힙합전쟁’

힙합은 90년대 세계 대중음악계의 주류 장르로 등극했다. 투팩이 등장한 것은 이 힙합이 단순한 음악장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정착하는 90년대 절정기였다. 순식간에 거대시장 미국을 장악하면서 세계 대중음악계를 석권한 거대한 힙합의 흐름은 80년대 초반 뉴욕을 중심으로 한 미국 동부에서 시작됐다. 처음 동부만의 문화였던 이 힙합의 중심은 80년대 중반부터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로 넘어가면서 마치 <초한지>처럼 동서양 힙합 진영이 밀고당기며 대결하는 양상으로 진행됐다.

애초 동부의 힙합은 내용부터 혁명적인 것이었다. 사회적 반항과 변혁의 욕구를 분출하는 하나의 인권운동과 같은 돌파구로 시작됐다. 그래서 힙합 발생 당시 동부의 힙합은 거칠고 어두운 사운드에 과격한 내용이 특징이었다. 그러다가 80년대 초·중반 이후 서부에서도 힙합이 새로운 흐름을 이루기 시작했다. 서부 힙합은 이른바 갱스터 힙합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성행했다. 섹스와 폭력, 마약 등의 내용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리듬 앤 블루스 곡들을 샘플링하는가 하면 코러스도 많이 들어가고 연주도 고급스러운 부드러운 멜로디를 내세워 동부 힙합에 비해서는 대중적이었다.

이처럼 동서부의 힙합이 서로 다른 색깔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동서 양쪽 힙합 진영에서 힙합 스타들이 등장했다. 동부에서는 우탱클랜 같은 과격파와 노토리어스 비아이지, 그리고 퍼프 대디가 힙합계를 이끌었다. 서부에서는 엠시해머, 투팩, 사이프레스 힐, 닥터 드레, 워렌G 등이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애초 같은 장르라는 점 때문에 친했던 이 동서 진영이 반목한 것은 90년대 들어서였다. 서부 힙합이 원조격인 동부를 누르고 힙합을 대표하는 듯하자 동부 진영에서 서부 힙합을 비난하는 가수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서부의 상업적 힙합에 비해 원조격인 동부가 더 힙합의 본질을 간직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이런 경향을 뒷받침했다. 동부쪽 팀 독이라는 래퍼가 로스앤젤레스 흑인 거주지역인 컴션이란 곳을 비하하는 <퍽 컴션>이란 노래를 발표하면서 두 진영은 갈라서게 됐다. 덩달아 서부쪽에서도 디제이 퀵이나 닥터 드레 등이 동부쪽 힙합을 욕했고, 서로 헐뜯으며 반목했다.

서부를 대표하는 투팩과 동부의 대표주자 노토리어스 비아이지도 한때는 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94년 투팩이 뉴욕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다 괴한들로부터 총상을 당했는데도 바로 근처에 있던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쪽 멤버들이 도와주지 않으면서 두 스타는 대립하게 됐다. 또한 투팩의 음반을 내던 음반사 사장이 동부 힙합계의 톱스타인 퍼프 대디에게 “잘난 척하지 마라”고 시비 걸면서 이들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문제는 언론과 자본이었다.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면서 음반을 더 많이 팔아먹으려는 음반사의 전략과 언론이 결합했다는 평론가들의 비난이 나올 정도로 음반사와 언론은 이들의 대립을 즐겼다. 팬들 사이에서는 96년 9월 투팩이 의문의 총격으로 죽은 것도 노토리어스 비아이지가 배후에서 사주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노토리어스 비아이지 역시 투팩이 총격을 당한 바로 그달 괴한한테 총격을 받아 나란히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미국 힙합계에서는 투팩 팬들이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에게 보복했다는 주장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구본준 기자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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