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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결혼해도 애 낳아도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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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8-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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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섯 나이와 부상에도 꿋꿋이 코트를 지킨 전주원의 무릎을 본 적이 있는가

▣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이제야 유심히 보게 된 것이지만, 코트를 지휘하던 그 손은 참 작았다. 농구공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손목은 가냘프다 싶을 정도로 얇았다. “태릉선수촌에서 악력(손을 쥐는 힘)을 잰 적이 있는데, 60대 할머니 수준이라고 하더라고요. 어머니가 그러세요. 네가 어떻게 운동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런데도 ‘전주원’이란 여자농구 대표 브랜드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 그의 무릎이 설명하고 있었다. 쭉쭉 그어져 있는 수술 상처들은 그의 피부가 하얀 탓에 더 선명하게 보였다.

“엄마, 파이팅~!” 여자프로농구 안산 신한은행 전주원 코치 겸 선수의 딸 수빈이는 체육관에서 재롱을 피우며 팀의 마스코트가 됐다. (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오른쪽은 6년 전 일본 나고야에서 받은 수술 자국이고, 왼쪽은 지난 4월18일 도쿄에서 수술한 거죠.”

2001년 오른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무릎 아래뼈와 위뼈를 중간에서 걸고 있는 인대가 기능 상실에 빠진 것이다. 당시 서른 살이었다. 1998년 일찌감치 결혼한 그는 ‘결혼은 곧 은퇴’였던 전례를 허문 상태였다. 이 정도도 여자농구에선 꽤 장수한 거였으니, 처음부터 운동을 반대했다는 어머니가 “이쯤에서 좀 쉬었으면…” 하고 바라는 건 당연한 듯 보였다. 게다가 무릎이 고장나면 운동을 포기하는 게 다반사였던 시절이다.

악착같은 재활훈련에 이상민도 “독하다”

“대부분 농구를 그만둬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끝낸다면 그동안 쌓아온 게 아쉬울 것 같았어요. 코트에서 은퇴 경기도 못하고 그만두고 싶진 않았어요.”

그의 코트 복귀는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를 수술한 일본 병원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른 복귀였다. ‘악착같은’ 재활훈련을 참고 이겨낸 덕이었다. 그와 동갑인 남자농구 이상민이 “참 독한 선수”라 말하는 건 괜한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이번에 왼쪽 무릎 수술받으려고 갔더니 이 상태로 6경기 뛰었다고 하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농구를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고 하는 거예요.”

그는 지난 겨울리그 막판 왼쪽 무릎을 다쳤다. 보호대를 차고 기어코 챔피언결정전에 나섰고, 소속팀 안산 신한은행에 사상 첫 통합챔피언(정규리그·챔피언전 동시 우승)을 안겼다.

“사실 인대가 완전히 끊어진 걸 몰랐어요. 무릎이 쭉쭉 밀리는 걸 느꼈지만 경기하면 당연히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코트에 있다는 것만으로 후배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잘 버텨보자고 했던 거죠.”

당시 이영주 신한은행 감독은 “(챔피언전 5차전까지 갔는데) 주원이가 다리가 풀린 상태에서도 끝까지 뛰는 것을 보고 참 고마우면서도 뭉클했다”고 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지금의 전주원을 만들어낸 이 무서운 투지를 ‘악바리’란 단어로 온전히 설명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왼무릎 수술로 또 6개월 이상 지긋지긋한 재활을 해야 하는데 ‘다시’ 코트에 서겠다는 이 못 말리는 열정을 도대체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후배들을 생각하면 더 잘하고 싶어

“선수 수명으론 환갑, 칠순도 넘겼다”는 그의 나이 서른여섯. 주부 10년차(워낙 코트에서 맹렬히 뛰는 바람에 1998년 결혼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35개월 된 딸 수빈이를 둔 엄마. 신한은행 플레잉코치 전주원은 “(10월에 시작하는) 정규리그가 선수생활을 더 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마지막 시험 무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 달리기와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몸을 만들고 있다. 수술 뒤 빠진 6kg의 몸무게를 되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대충 하는 것도 아니다. 웨이트 훈련은 후배들 이상이라니, 여린 이미지를 풍기는 ‘미녀 가드’란 말도 실은 그를 대변할 만한 별명이 되지 못한다.

국내 여자농구 최고령 선수. 그는 왜 또 뛰는가?

“코트에 있으면 즐겁기 때문이죠. 내 몸이 여전히 원하고 있어요. 나를 보기 위해 오는 단 한 명의 팬을 위해서라도 뛰어야죠. 또 이왕 할 거면 똑바로 해야죠. 잘하는 것보다 열심히 하겠다는 거예요. 후배들에게 ‘나도 언니처럼 저 나이까지 할 수 있겠구나’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아이 낳고 뛰는 건 제가 처음이잖아요. 결혼해서도 할 수 있고, 애를 키우면서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주자는 거죠. 오히려 후배들이 그래요. ‘언니 더 오래 하세요. 그래야 우리도 할 수 있잖아요’라고.”

그는 2004년 초 국제대회에 출전했다가 몸이 이상해 일본 시내에서 시약검사로 임신 사실을 알았다. 그해 3월 눈물의 은퇴식을 갖고 코치로 변신한 그는 딸을 낳은 뒤 2005년 선수로 돌아오는 모험을 감행했다. 무모할 수 있다는 우려에 그는 등번호 0번을 달아 ‘초심으로 돌아가면 될 것 아니냐’는 강단을 보였다.

“구단에서 설득할 때 안 한다고 버텼죠. 임신과 출산 등 1년6개월의 공백에 대한 위험도 감수해야 하고. 무엇보다 전주원답지 못할까봐 걱정했는데…. 우리 팀이 늘 마지막 5분을 버티지 못하고 지고, 꼴찌를 하니까.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돼주기 위해 코트에 선 거죠.”

신한은행 전신인 청주 현대가 모기업의 지원 중단으로 공중 분해 위기에 빠져 여관에서 지내며 떠돌이 생활을 할 때도 그는 만삭의 몸으로 그 틈에서 후배들과 같이한 선배였다.

돌아온 전주원은 그의 걱정과 달리 전주원다웠다. 그는 센터가, 포워드가 입을 벌리고 있으면 받아먹기 좋게 입속으로 쏙쏙 넣어주는 가드였다. 어시스트 순위 상단에 그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고, 2007 겨울리그에선 어시스트 1위, 팀 정규리그 우승으로 뒤늦게 생애 첫 최우수선수상도 받았다.

‘엄마 그것밖에 못할 거면서…’ 할까봐

초등학교 5학년 때 테스트를 통해 농구를 시작했으니 선수로만 24년째다. 당시 그 테스트에 있었던 황신철 감독은 “키가 작았는데 눈이 또랑또랑하고 말을 야무지게 했던 기억이 난다. 참 훈련을 열심히 하는 아이였다”고 떠올렸다. 선일여고 27연승 신화를 작성했던 전주원은 고교 졸업 직후 국가대표에까지 뽑혔다. 여자 선수론 드물게 비하인드 패스까지 선보이며 팬들을 몰고 다닌 그는 1994년 히로시마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과 2000년 시드니올림픽 4강을 이끌었다. 그는 시드니 대회에서 한국 남녀 농구의 올림픽 경기 사상 첫 트리플더블을 기록하기도 했다.

탄산음료도 먹지 않을 만큼 지독하게 자기를 관리하는 전주원은 16년 전 실업 무대에 처음 등장할 때 받은 기대처럼 여전히 최고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는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이름만 갖고 있지 사실 빵점에 가깝다”며 가족의 양보와 이해에 고마워했다. 그러곤 할머니와 같이 지내느라 “엄마 나 오늘 밥을 시원찮게 먹었다”는 어른 투 말을 흉내낸다는 딸 수빈이에게 부끄러운 엄마가 되어야겠냐고 했다.

“수빈이가 ‘엄마 그것밖에 못할 거면서 날 안 키웠냐’고 할까봐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어요. 만약 내 스스로 버겁다고 느껴질 때가 오면 추해지지 않도록 미련 없이 떠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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