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대결’에서 함께 응원하는 분위기로 바뀌어온 남북한의 스포츠 교류
▣ 신명철 <스포츠 2.0> 편집위원
2003년 8월31일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남자배구 결승전. 강만수가 활약한 1979년 멕시코 대회에서 처음 우승한 뒤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강세를 보인 한국 남자배구는 앙숙 일본과 맞붙었다. 대구체육관에는 북쪽 여성 응원단을 포함한 6천여 명의 관중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차 뜨거운 열기를 뿜었다. 한국은 1, 3세트를 내주고 2, 4세트를 잡으며 따라붙는 끈질긴 경기를 벌인 끝에 3-2로 역전승해, 1997년 시칠리아 대회 이후 6년 만에 통산 네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 소식 들으니… 이경수(당시 24살·LG화재) 등 일부 실업팀 선수가 있었지만 대회 성격에 맞게 신영수(당시 21살·한양대) 등 대학생을 중심으로 대표팀을 꾸린 한국은 경기가 열리기 전 북쪽 응원단 앞에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묘하게도 북쪽 응원단이 있는 쪽에서 경기를 한 2, 4세트와 5세트 후반에서 모두 앞서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응원용 ‘짝짝이’를 손에 끼고 열광하던 북쪽 응원단을 기억하는 스포츠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에 앞서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도 북한은 선수단과 함께 여성 응원단을 보냈다. 부산 앞바다에 정박한 배에서 먹고 잔 북쪽 여성 응원단의 일거수일투족은 대회 기간 내내 화제가 됐다. 이 대회를 통해 남쪽에서도 제한적이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국기가 게양되고, 국가가 연주됐다. 북괴(北傀)라는 말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매우 어색한 상황이지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이 8월 말 평양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떠오른 생각이다. 30년 가까이 스포츠 기사를 쓰고 있는 글쟁이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적대적 관계에 있는 나라가 관계 정상화를 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스포츠 교류다. 1971년 미국과 중국 사이의 핑퐁 외교가 대표적인 사례다. 남북 관계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본격적으로 국제 무대에 얼굴을 내민 때는 1960년대 중반 이후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의 성과를 이룬 북한은 1972년 뮌헨 대회와 1974년 테헤란 대회를 통해 각각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에 데뷔했다. 뮌헨올림픽에서 금1, 은1, 동메달 3개로 종합 22위에 오르고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15, 은14, 동메달 17개로 종합 5위를 차지하며 자신감을 얻은 북한은 그 뒤 여러 국제대회에 부지런히 나서 한국과 각종 종목에서 자주 경기를 했다. 지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남북 대결’이 수시로 이뤄졌다. 197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축구 결승전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신세대 스포츠팬도 알고 있는 대표적인 남북 경기다. 그때는 올림픽이나 아시아경기대회 입장식 때 북한이 입장하면 일부러 현장 중계를 끊고 잠시 다른 화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외면했으니 뿔 달린 북괴는 살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남북 스포츠 교류의 암흑기 남북은 1980년대 스포츠를 통해 한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서울에서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올림픽이 잇따라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봤을 때 1980년대는 남북 스포츠 교류의 암흑기였다. 한국은 두 대회를 잘 치렀다. 특히 서울올림픽은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미국과 그를 따르는 나라들이 불참한 데 따른 보복으로 이번에는 중국과 루마니아 등 일부 나라가 빠진 옛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출전하지 않아 또다시 반쪽 대회가 된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이후 동서 양 진영의 모든 나라가 출전한 동서 화합의 대회가 됐다. 그러나 북한은 두 대회에 모두 나오지 않았다. 1987년 2월 인도 뉴델리에서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한국은 여자복식 결승에서 양영자-현정화 조가 중국의 다이리리-리후이펀 조를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훗날 여자 탁구 그랜드슬램을 이루는 단발머리 여고생 현정화의 화려한 국제무대 데뷔였다. 이 대회에서 북한 탁구협회 서기장이 남한 출신이고, 1975년과 1977년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단식 2연속 우승에 빛나는 박영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북쪽 관계자들을 통해 알게 되는 등 남북 탁구인들은 교류를 이어갔다. 1987년 11월 옛 서독 에센에서는 세계유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한국은 김재엽이 남자 60kg급 결승에서 일본의 호소가와 신지를 통쾌한 허벅다리걸기 한판으로 물리치고 이듬해 서울올림픽 금메달을 예고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하형주는 95kg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여자 48kg급에 나선 서울체육중 3학년 조민선은 훗날 66kg급에서 1993, 95년 세계선수권대회 2연속 우승, 그리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챔피언이 된다. 북한은 이 대회에서 박정철이 86kg급에서 은메달, 이창수가 71kg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이 대회에서 한국 선수단은 북한 선수단과 김밥을 나눠 먹는 등 우의를 나눴다. 겉으로 봤을 때는 꽁꽁 얼어붙었지만 얼음 아래로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는 남북 스포츠 교류에 큰 획을 그었다. 남북이 모두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했고 북한은 응원단까지 보냈다. 소프트볼에서 첫 남북 경기를 가진 데 이어 여러 종목에서 남과 북이 마주쳤다. 3년 전 인도 뉴델리와 서독 에센에서 만났던 남북 유도인과 탁구인은 경기장과 ‘야윈춘’(亞運村)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다. 특히 탁구는 남북 모두 세계 수준의 경기력을 갖춰 각종 국제대회서 자주 만났다. 그사이 알게 모르게 쌓인 친화력을 바탕으로 이듬해 일본 지바에서 벌어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에서 중국을 3-2로 물리치고 현정화, 홍차옥(이상 남쪽)과 리분희, 유순복(이상 북쪽)이 시상대 위에서 한반도기가 게양되는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일흔 넘었을 북쪽 선배 만나게 되길 선수와 임원들만 교류한 게 아니다. 남북의 기자들도 경기장에서, 기자 숙소에서 마주쳤다. 그때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북한의 한 기자와 친분을 나눴다. 국내 타사 선배 기자에게 하듯 ‘선배’라고 부르며 예의를 갖춰 대했다. 세상 살아가는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맥주도 한잔 나누고 헤어졌는데 그 기자는 아시아경기대회가 끝나고 곧 이어 열린 남북통일축구경기 때 서울에 왔다. 그는 이름이 꽤 알려진 기자였다. 북쪽 기자단의 선임이었다. 그 기자는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때 낯을 익힌 또 다른 기자를 통해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평양으로 돌아가기 전날이었다. 다음날 아침 부지런히 북쪽 선수단이 묵고 있는 숙소로 갔다. 베이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집사람이 그 기자의 부인을 위해 준비한 국내 유명 회사의 화장품 종합세트를 들고. 1년 뒤 베이징에서 이번에는 올림픽이 열린다. 이달 말에는 남북의 정상이 만난다. 내년 8월 남북이 단일(유일)팀을 꾸려 세계의 스포츠 강국들과 겨루는 장면을 보고 싶다. 그리고 일흔이 넘었을 그 선배 기자와 그곳에서 만나고 싶다. “건강하시죠, L선배.”

‘우리는 하나다.’ 2003년 8월31일 대구에서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남자 배구 결승전에서 일본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 남쪽 선수들이 경기 내내 열광적인 응원을 해준 북쪽 응원단에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
제2차 남북정상회담 소식 들으니… 이경수(당시 24살·LG화재) 등 일부 실업팀 선수가 있었지만 대회 성격에 맞게 신영수(당시 21살·한양대) 등 대학생을 중심으로 대표팀을 꾸린 한국은 경기가 열리기 전 북쪽 응원단 앞에서 인사를 했다. 그리고 묘하게도 북쪽 응원단이 있는 쪽에서 경기를 한 2, 4세트와 5세트 후반에서 모두 앞서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응원용 ‘짝짝이’를 손에 끼고 열광하던 북쪽 응원단을 기억하는 스포츠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에 앞서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도 북한은 선수단과 함께 여성 응원단을 보냈다. 부산 앞바다에 정박한 배에서 먹고 잔 북쪽 여성 응원단의 일거수일투족은 대회 기간 내내 화제가 됐다. 이 대회를 통해 남쪽에서도 제한적이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국기가 게양되고, 국가가 연주됐다. 북괴(北傀)라는 말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매우 어색한 상황이지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이 8월 말 평양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떠오른 생각이다. 30년 가까이 스포츠 기사를 쓰고 있는 글쟁이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적대적 관계에 있는 나라가 관계 정상화를 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스포츠 교류다. 1971년 미국과 중국 사이의 핑퐁 외교가 대표적인 사례다. 남북 관계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본격적으로 국제 무대에 얼굴을 내민 때는 1960년대 중반 이후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의 성과를 이룬 북한은 1972년 뮌헨 대회와 1974년 테헤란 대회를 통해 각각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에 데뷔했다. 뮌헨올림픽에서 금1, 은1, 동메달 3개로 종합 22위에 오르고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15, 은14, 동메달 17개로 종합 5위를 차지하며 자신감을 얻은 북한은 그 뒤 여러 국제대회에 부지런히 나서 한국과 각종 종목에서 자주 경기를 했다. 지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남북 대결’이 수시로 이뤄졌다. 197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축구 결승전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신세대 스포츠팬도 알고 있는 대표적인 남북 경기다. 그때는 올림픽이나 아시아경기대회 입장식 때 북한이 입장하면 일부러 현장 중계를 끊고 잠시 다른 화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외면했으니 뿔 달린 북괴는 살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남북 스포츠 교류의 암흑기 남북은 1980년대 스포츠를 통해 한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서울에서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올림픽이 잇따라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봤을 때 1980년대는 남북 스포츠 교류의 암흑기였다. 한국은 두 대회를 잘 치렀다. 특히 서울올림픽은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미국과 그를 따르는 나라들이 불참한 데 따른 보복으로 이번에는 중국과 루마니아 등 일부 나라가 빠진 옛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출전하지 않아 또다시 반쪽 대회가 된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이후 동서 양 진영의 모든 나라가 출전한 동서 화합의 대회가 됐다. 그러나 북한은 두 대회에 모두 나오지 않았다. 1987년 2월 인도 뉴델리에서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한국은 여자복식 결승에서 양영자-현정화 조가 중국의 다이리리-리후이펀 조를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훗날 여자 탁구 그랜드슬램을 이루는 단발머리 여고생 현정화의 화려한 국제무대 데뷔였다. 이 대회에서 북한 탁구협회 서기장이 남한 출신이고, 1975년과 1977년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단식 2연속 우승에 빛나는 박영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북쪽 관계자들을 통해 알게 되는 등 남북 탁구인들은 교류를 이어갔다. 1987년 11월 옛 서독 에센에서는 세계유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한국은 김재엽이 남자 60kg급 결승에서 일본의 호소가와 신지를 통쾌한 허벅다리걸기 한판으로 물리치고 이듬해 서울올림픽 금메달을 예고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하형주는 95kg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여자 48kg급에 나선 서울체육중 3학년 조민선은 훗날 66kg급에서 1993, 95년 세계선수권대회 2연속 우승, 그리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챔피언이 된다. 북한은 이 대회에서 박정철이 86kg급에서 은메달, 이창수가 71kg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이 대회에서 한국 선수단은 북한 선수단과 김밥을 나눠 먹는 등 우의를 나눴다. 겉으로 봤을 때는 꽁꽁 얼어붙었지만 얼음 아래로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는 남북 스포츠 교류에 큰 획을 그었다. 남북이 모두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했고 북한은 응원단까지 보냈다. 소프트볼에서 첫 남북 경기를 가진 데 이어 여러 종목에서 남과 북이 마주쳤다. 3년 전 인도 뉴델리와 서독 에센에서 만났던 남북 유도인과 탁구인은 경기장과 ‘야윈춘’(亞運村)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다. 특히 탁구는 남북 모두 세계 수준의 경기력을 갖춰 각종 국제대회서 자주 만났다. 그사이 알게 모르게 쌓인 친화력을 바탕으로 이듬해 일본 지바에서 벌어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에서 중국을 3-2로 물리치고 현정화, 홍차옥(이상 남쪽)과 리분희, 유순복(이상 북쪽)이 시상대 위에서 한반도기가 게양되는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일흔 넘었을 북쪽 선배 만나게 되길 선수와 임원들만 교류한 게 아니다. 남북의 기자들도 경기장에서, 기자 숙소에서 마주쳤다. 그때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북한의 한 기자와 친분을 나눴다. 국내 타사 선배 기자에게 하듯 ‘선배’라고 부르며 예의를 갖춰 대했다. 세상 살아가는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맥주도 한잔 나누고 헤어졌는데 그 기자는 아시아경기대회가 끝나고 곧 이어 열린 남북통일축구경기 때 서울에 왔다. 그는 이름이 꽤 알려진 기자였다. 북쪽 기자단의 선임이었다. 그 기자는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때 낯을 익힌 또 다른 기자를 통해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평양으로 돌아가기 전날이었다. 다음날 아침 부지런히 북쪽 선수단이 묵고 있는 숙소로 갔다. 베이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집사람이 그 기자의 부인을 위해 준비한 국내 유명 회사의 화장품 종합세트를 들고. 1년 뒤 베이징에서 이번에는 올림픽이 열린다. 이달 말에는 남북의 정상이 만난다. 내년 8월 남북이 단일(유일)팀을 꾸려 세계의 스포츠 강국들과 겨루는 장면을 보고 싶다. 그리고 일흔이 넘었을 그 선배 기자와 그곳에서 만나고 싶다. “건강하시죠, L선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