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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작은 축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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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8-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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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불모지 찾아 희망을 심는 남해초교 축구팀 이상목 코치

▣ 경주=글·사진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지난 8월8일 오후 3시께 경북 경주시 황성동 축구공원. 비에 흠뻑 젖었는데도 아이들의 얼굴엔 먹구름 한 점 없었다. “오늘 우리가 2-1로 이겼잖아요.” 뒤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는 아이들 틈에 코치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계시냐’고 묻자, “저기 경기장 뚝방 위에요. 더 있다 오실 거예요”라고 했다.

“비가 내립니다.” “허허, 난 비가 좋습니다.”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비를 그대로 받아들이던 그는 수첩 글씨만은 번지지 않게 모자 창 밑으로 끌어당겼다. 경기 중인 다른 학교 선수들의 포지션과 특성들이 손바닥만 한 수첩에 고스란히 옮겨지고 있었다. 이튿날 맞붙을 팀이었다.


어릴 때 척추 다치고 신경계통 병 앓아

‘축구는 내 운명이다.’ 이상목 남해초등학교 축구부 코치(왼쪽)는 경기가 끝난 뒤에도 다음 경기에 맞붙을 상대팀 전략을 탐색하느라 경기장을 쉽게 뜨지 못한다. 곁에 선 이는 박진희 감독.

한참 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웅크리고 앉아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키. 등이 동그랗게 말린 그는 허리를 펴지 못했다. 전국 축구부 지도자 중 최단신. 장난꾸러기 선수들을 올려다봐야 하는 왜소한 몸. 그는 남해초등학교 축구팀 아이들이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 하며 따르는 곱사등이 이상목(54) 코치다.

“세 살 때 척추를 다쳤어요. 땅에 떨어진 건지…. 왜 그랬는지는 잘 몰라요. 여덟 살에 신경계통 병을 크게 앓은 뒤 몸이 이렇게 됐죠. 그 뒤론 7∼8년 집에 누워 있었어요.”

그는 “이게 내 운명”이라면서 “축구가 없었다면 아마 난 지금쯤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학교 문턱도 넘지 못했다. “동생 국어책에 ‘어머니’ ‘바둑이’ 이렇게 써 있는 것들을 어깨너머로 보며 한글을 깨우쳤죠. 지금도 어려운 받침 같은 게 막히면 우리 선수들한테 물어봐요. 배우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잖아요?” 경주에서 열리는 2007 화랑대기 초등학교 전국대회에 출전한 그는 여기저기 돋은 수염도 깎지 못했다.

국어책을 보여줬던 그 동생이 초등학교 축구부에 몸담고 있었다. “동생 학교로 가서 구경도 하고 이것저것 챙겨주곤 했는데, 당시 감독님이 ‘어떻게 그렇게 축구를 잘 아느냐’고 하시더라고요.” 한글이 조금씩 보이던 그는 신이 났고, 그즈음 독학으로 파헤친 축구 서적이 여러 권이었다.

진해 덕산초 감독은 그가 남다른 축구 열정과 지식을 가졌다고 보고 친동생 또래 선수들을 돌봐줄 수 있겠냐며 세상 밖으로 그를 불러냈다. 그의 나이 17살. 37년간 축구만 보고 걸어온 삶은 한 감독이 내민 손길로 시작됐다.

‘당신이 뭘 가르치냐’는 학부모들 냉소

직접 뛸 수 없는 몸이었기에 그는 “축구 교본과 경기 테이프 등을 쌓아놓고 보고 또 봤다. 단순히 보기만 하면 내 축구가 될 수 없으니까 책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들려고 참 많이 고민했다”고 했다. 그는 울산 현대중, 창원 토월중, 거제 연초중, 창원 상남초·대산초등학교 등을 거치며 코치와 스카우트로 일했다. 국가대표 출신 신홍기(은퇴), 프로축구 현역 선수 정종관(전북 현대)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선수들을 뽑으려고 가면 ‘당신이 뭘 가르치냐’고 하는 분들이 많았죠. 어떻게 우리 아이를 내주느냐며 거의 거지 취급도 당해보고….” 냉소적인 학부모들은 그가 아닌 다른 학부모들한테 설득을 당하곤 했다. “저분 정말 대단한 분이다. 아주 꼼꼼하게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난 뒤였다.

그가 창단 8년밖에 되지 않은 남해초 축구부로 온 계기도 그랬다. 29살 박진희 감독은 그를 아버지처럼 모신다고 했다. “제가 처음 감독으로 왔을 때 선수가 5명밖에 없었어요. 어떻게 끌어모아봤지만 여자를 포함해 13명 정도였죠. 3년 전 코치 영입을 고민하고 있는데 예전에 이 코치님한테 아이를 보냈던 분들이 남해에 사시는데 저에게 좋은 분이라며 추천을 하시더라고요.”

선수가 금세 30명 남짓으로 불어났다. 축구부는 지난해 남해 사상 처음 경남 대표로 소년체전에 나가 동메달을 땄다. 올해 거둔 우승만 벌써 두 번. 이 코치는 “난 축구 불모지를 찾아다니는데, 이런 곳에 와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 참 뿌듯하다”고 했다.

박 감독은 “대통령 표창도 드려야 할 분이다. 국가대표도 저분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밤늦게 주무시지도 않고 다양한 전술 그림을 그려 아이들에게 나눠주거나, 이런 상황일 때 어떤 전술로 대처해야 하는지 객관식 그림을 그려 문제를 풀어오라고 하세요. 저도 선생님이 상대팀과 아이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시니까 경기 중 ‘이럴 땐 어떻게 합니까?’라고 조언을 많이 구하죠.”

“아이들의 기본기부터 탄탄히 다져야”

최근 자진 사퇴한 핌 베어벡 감독은 전술 이해 능력을 갖춘 ‘생각하는 축구’를 늘 강조했다. 그걸 월급 90만원 받는 조그만 학교의 50대 지도자가 묵묵히 실천해온 것이다.

이 코치는 “축구 때문에 우리 부모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다”고 했다. 주변에선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한 아이들이 방황하지 않고 잘 지내는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만나고 돌보느라 그랬다”고 전했다.

그는 엄하면서도 자상한 선생님으로 통한다. “우리나라는 국가대표만 신경쓰는데 학교 축구를 보면 거의 학부모 돈으로 운영이 됩니다. 유소년 축구에 지원을 해야죠. 무조건 뛰게 해서도 안 됩니다. 기본기가 중요하죠. 몸 중심을 잡을 줄 알아야 하고 볼 키핑도 어릴 때부터 잘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발 밑에서 공을 갖고 놀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가 축구를 갓 시작한 아이들의 기본기를 탄탄히 다지면, 감독은 궤도에 오른 아이들을 본격적으로 지도한다. 남해초등학교 돌풍의 힘은 이런 호흡에서 나왔다.

그는 “운동이 끝나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그래서 그는 운동에 관심이 없는 듯 보이면 그만두고 빨리 공부하라고 권유한다), 무엇보다 예의 바른 선수로 키우려 한다”고 했다. “처자식 고생시킬까봐”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그는 아이들의 인성을 위해 담배도 입에 물지 않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한 번쯤 정상적으로 태어나 못해본 선수 생활을 한 뒤 멋지게 지도자를 해보고 싶다”며 웃은 그는 “괜히 나 때문에 상대가 우리 아이들을 얕잡아볼까봐 가끔 걱정된다”며 자신을 낮췄다.

그는 나이 어린 박 감독이 “이곳에서 마무리하시라”며 만류하는데도 “난 또 다른 축구 불모지로 떠날 생각”이라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굽은 몸으로 남들이 가지 않는 곳을 걸어가는 선생님. 그는 지금 아이들에게 삶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란 무엇인지를 깡마른 작은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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