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십니까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여기는 장충체육관입니다”
▣ 신명철 <스포츠 2.0> 편집위원
오랜만에 퇴근 시간 버스 안에서 라디오 중계를 들었다. 7월25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벌어진 2007 아시안컵 축구대회 준결승 한국과 이라크의 경기였다. 경기 시간이 퇴근 시간에 걸려 사무실에서 볼까 집에 가서 볼까 망설이다가, 맘을 정하지 못하고 전반전은 사무실에서 TV 중계를 보게 됐다. 여러 해에 걸친 경험으로 봐 경기가 길어질 것 같아 전반전이 끝나자마자 얼른 사무실에서 나와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기사는 승객이 모두 들으라고 라디오 음량을 잔뜩 높여놓고 있었다.
시종일관 한국이 우세한 ‘애국 중계’ 스포츠팬들에게 라디오 중계는 아련한 추억이다. 아니 요즘도 라디오 중계는 스포츠의 맛을 즐길 수 있는 특별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상상의 나래를 펴며 경기를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야구는 라디오 중계에 딱 들어맞는 종목이다. 경기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들을 수 있어서다. 인터넷 그래픽 중계가 컴퓨터 화면이 아닌 청취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다. 좌전 안타를 친 주자가 1루에 나가면 그라운드가 그려지고 1루에 주자가 서 있는 장면이 자동적으로 올라간다. 경기의 모든 내용이 기록지에 옮겨져 바둑처럼 완벽하게 복기가 가능한 종목이기 때문이다. 문장력만 받쳐주면 경기를 보지 않은 기자가 경기를 본 기자보다 더 감칠맛 나는 기사를 쓸 수 있는 종목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가상의 작업은 농구, 배구 등 거의 모든 종목이 가능하다. 포인트 가드의 움직임과 센터의 피벗 플레이, 세터의 눈부신 토스에 이는 A퀵 등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다만 경기장이 넓은 축구는 이같은 작업이 다소 힘들기는 한데 축구 경기장을 자주 찾은 팬이라면 역시 가능하다. 선수들은 몸으로 하는 훈련 말고 머리로 하는 훈련도 하는데 이른바 ‘이미지 트레이닝’이다. 야구선수라면 “나는 3루수다. 무사 1, 2루인데 유격수 쪽으로 치우친 땅볼이 내 앞으로 온다. 이때 2루에서 3루로 뛰는 주자를 태그하고 1루로 던져 타자 주자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2루수~1루수로 연결하는 더블플레이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축구선수라면 “나는 오른쪽 날개 공격수다. 나를 맡는 선수는 김아무개인데 이 선수는 내가 왼쪽으로 헛동작을 한 뒤 오른쪽으로 꺾어 터치라인을 타고 드리블을 하는 버릇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일 경기에서는 반대로 동작을 하고 미드필드 가운데로 치고 들어가다가 왼발로 슛을 날려볼까?” 하고 가상의 경기 장면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라디오 중계를 듣는 스포츠팬은 다른 꼴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셈이다. 라디오 중계는 숱한 일화를 낳았다. 1994년 6월16일(현지시각) 미 로스앤젤레스의 로즈볼구장에선 스웨덴-불가리아의 미국 월드컵 3위 결정전이 열리고 있었다. 마침 다른 종목 취재를 위해 미국 동부 지역에 갔다가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귀국하는 길이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 시내로 가는 길에 한인 라디오로 그 경기 중계를 듣게 됐다. 낭랑한 목소리의 아나운서는 경기를 그려내듯 중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서인가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1960~70년대 라디오 중계를 주름잡던 이광재 아나운서였다. 이분을 비롯한 그 무렵 아나운서들이 외국에서 열리는 대회를 중계할 때면 빼놓지 않고 하는 ‘오프닝 (코)멘트’가 있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여기는 상하의 나라 ○○의 수도 ○○입니다.” 여기서 나라 이름은 타이 또는 말레이시아, 도시 이름은 방콕 또는 쿠알라룸푸르일 경우가 많았다. 그때 한국 스포츠의 주무대는 동남아시아였다. 이번 아시안컵이 스포츠 올드팬들에게 새삼스러웠을 까닭이다. 중계방송을 알리는 음악이 나가고 아나운서의 소개말이 이어지면 스포츠팬들은 흥분된 가슴을 쓸어내리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다. 가끔 엉뚱한 소개말이 나가도 그냥 지나치면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여기는 장충체육관입니다.” 라디오 중계는 스포츠팬이 눈으로 볼 수 없으니 경기 내용 모두를 아나운서의 말을 믿고 들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른바 ‘애국중계’가 가능하다. 1964년 도쿄올림픽 복싱 밴텀급 결승전 한국의 정신조-일본의 사쿠라이 다카오전, 1968년 멕시코올림픽 복싱 라이트플라이급 결승전 한국의 지용주-베네수엘라의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전 등 여러 국제대회에서 중계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의 정신조, 레프트 잽 라이트 스트레이트. 한국의 지용주, 원투 스트레이트, 라이트 어퍼컷”을 외치지만 결과는 허무하게도 한국 선수의 패배였다. 청취자들의 머릿속에서는 한국 선수의 주먹이 쉬지 않고 나갔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라디오 중계는 서서히 TV 중계에 자리를 내준다. 특히 국내에서 벌어지는 프로복싱, 프로레슬링, 여자농구 등 인기 종목 경기의 경우 1960년대에 이미 TV가 라디오를 앞서기 시작한다. 이 무렵 만화가게와 다방은 스포츠 중계에 등장한 새로운 미디어를 만나는 주무대였다. 멕시코월드컵부터 바뀐 중계방식 1970년 6월 녹화 지연 중계였지만 멕시코-옛 소련의 개막전을 비롯한 모든 경기가 중계된 멕시코월드컵은 국내 스포츠팬들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화면은 흑백이었지만 왠지 더 깔끔한 느낌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국내에서는 아직 TV가 컬러로 방영되고 있지 않았지만 위성으로 수신되는 화면은 컬러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스포츠 중계도 지난날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외국 선수들에 대한 자료를 찾는 일부터 시작해 차분한 중계와 해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변사 시대에서 동시녹음 시대로 발전했다고나 할까. 국내 스포츠팬이 컬러 TV로 스포츠 중계를 본격적으로 볼 수 있었던 국제대회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이다. 한국은 1970년대 이미 컬러 TV를 생산해 수출까지 하고 있었으나, 컬러 TV 방영은 컬러 TV 소유 여부에 따라 빈부 격차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등 요즘의 사회 경제상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로 미뤄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 12월1일 컬러 방송이 처음 전파를 탔다. 버스 안에서 한국-이라크전 중계를 들으며 그날 아침에 본 외신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로이터통신>은 이라크 현지 팬들이 이날 오후 7시20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리는 한국과 이라크의 4강 대결을 보기 위해 집집마다 20∼30ℓ씩 석유를 구입해 자체 발전기를 가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라크는 전기 공급 사정이 좋지 않아 자주 정전이 발생하기 때문에 경기 시간에 맞춰 발전기를 돌리려는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은 설명했다.” 그놈의 전쟁 때문이겠지.이번호 주요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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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웠던 시절 유일한 오락매체이던 라디오는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1957년 10월23일 제38회 전국체육대회에서 라디오로 실황 중계를 하는 모습.(사진/ 대한민국 정부 기록 사진집)
시종일관 한국이 우세한 ‘애국 중계’ 스포츠팬들에게 라디오 중계는 아련한 추억이다. 아니 요즘도 라디오 중계는 스포츠의 맛을 즐길 수 있는 특별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상상의 나래를 펴며 경기를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야구는 라디오 중계에 딱 들어맞는 종목이다. 경기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들을 수 있어서다. 인터넷 그래픽 중계가 컴퓨터 화면이 아닌 청취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다. 좌전 안타를 친 주자가 1루에 나가면 그라운드가 그려지고 1루에 주자가 서 있는 장면이 자동적으로 올라간다. 경기의 모든 내용이 기록지에 옮겨져 바둑처럼 완벽하게 복기가 가능한 종목이기 때문이다. 문장력만 받쳐주면 경기를 보지 않은 기자가 경기를 본 기자보다 더 감칠맛 나는 기사를 쓸 수 있는 종목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가상의 작업은 농구, 배구 등 거의 모든 종목이 가능하다. 포인트 가드의 움직임과 센터의 피벗 플레이, 세터의 눈부신 토스에 이는 A퀵 등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다만 경기장이 넓은 축구는 이같은 작업이 다소 힘들기는 한데 축구 경기장을 자주 찾은 팬이라면 역시 가능하다. 선수들은 몸으로 하는 훈련 말고 머리로 하는 훈련도 하는데 이른바 ‘이미지 트레이닝’이다. 야구선수라면 “나는 3루수다. 무사 1, 2루인데 유격수 쪽으로 치우친 땅볼이 내 앞으로 온다. 이때 2루에서 3루로 뛰는 주자를 태그하고 1루로 던져 타자 주자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2루수~1루수로 연결하는 더블플레이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축구선수라면 “나는 오른쪽 날개 공격수다. 나를 맡는 선수는 김아무개인데 이 선수는 내가 왼쪽으로 헛동작을 한 뒤 오른쪽으로 꺾어 터치라인을 타고 드리블을 하는 버릇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일 경기에서는 반대로 동작을 하고 미드필드 가운데로 치고 들어가다가 왼발로 슛을 날려볼까?” 하고 가상의 경기 장면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라디오 중계를 듣는 스포츠팬은 다른 꼴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셈이다. 라디오 중계는 숱한 일화를 낳았다. 1994년 6월16일(현지시각) 미 로스앤젤레스의 로즈볼구장에선 스웨덴-불가리아의 미국 월드컵 3위 결정전이 열리고 있었다. 마침 다른 종목 취재를 위해 미국 동부 지역에 갔다가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귀국하는 길이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 시내로 가는 길에 한인 라디오로 그 경기 중계를 듣게 됐다. 낭랑한 목소리의 아나운서는 경기를 그려내듯 중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서인가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1960~70년대 라디오 중계를 주름잡던 이광재 아나운서였다. 이분을 비롯한 그 무렵 아나운서들이 외국에서 열리는 대회를 중계할 때면 빼놓지 않고 하는 ‘오프닝 (코)멘트’가 있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여기는 상하의 나라 ○○의 수도 ○○입니다.” 여기서 나라 이름은 타이 또는 말레이시아, 도시 이름은 방콕 또는 쿠알라룸푸르일 경우가 많았다. 그때 한국 스포츠의 주무대는 동남아시아였다. 이번 아시안컵이 스포츠 올드팬들에게 새삼스러웠을 까닭이다. 중계방송을 알리는 음악이 나가고 아나운서의 소개말이 이어지면 스포츠팬들은 흥분된 가슴을 쓸어내리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다. 가끔 엉뚱한 소개말이 나가도 그냥 지나치면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여기는 장충체육관입니다.” 라디오 중계는 스포츠팬이 눈으로 볼 수 없으니 경기 내용 모두를 아나운서의 말을 믿고 들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른바 ‘애국중계’가 가능하다. 1964년 도쿄올림픽 복싱 밴텀급 결승전 한국의 정신조-일본의 사쿠라이 다카오전, 1968년 멕시코올림픽 복싱 라이트플라이급 결승전 한국의 지용주-베네수엘라의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전 등 여러 국제대회에서 중계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의 정신조, 레프트 잽 라이트 스트레이트. 한국의 지용주, 원투 스트레이트, 라이트 어퍼컷”을 외치지만 결과는 허무하게도 한국 선수의 패배였다. 청취자들의 머릿속에서는 한국 선수의 주먹이 쉬지 않고 나갔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라디오 중계는 서서히 TV 중계에 자리를 내준다. 특히 국내에서 벌어지는 프로복싱, 프로레슬링, 여자농구 등 인기 종목 경기의 경우 1960년대에 이미 TV가 라디오를 앞서기 시작한다. 이 무렵 만화가게와 다방은 스포츠 중계에 등장한 새로운 미디어를 만나는 주무대였다. 멕시코월드컵부터 바뀐 중계방식 1970년 6월 녹화 지연 중계였지만 멕시코-옛 소련의 개막전을 비롯한 모든 경기가 중계된 멕시코월드컵은 국내 스포츠팬들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화면은 흑백이었지만 왠지 더 깔끔한 느낌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국내에서는 아직 TV가 컬러로 방영되고 있지 않았지만 위성으로 수신되는 화면은 컬러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스포츠 중계도 지난날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외국 선수들에 대한 자료를 찾는 일부터 시작해 차분한 중계와 해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변사 시대에서 동시녹음 시대로 발전했다고나 할까. 국내 스포츠팬이 컬러 TV로 스포츠 중계를 본격적으로 볼 수 있었던 국제대회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이다. 한국은 1970년대 이미 컬러 TV를 생산해 수출까지 하고 있었으나, 컬러 TV 방영은 컬러 TV 소유 여부에 따라 빈부 격차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등 요즘의 사회 경제상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로 미뤄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 12월1일 컬러 방송이 처음 전파를 탔다. 버스 안에서 한국-이라크전 중계를 들으며 그날 아침에 본 외신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로이터통신>은 이라크 현지 팬들이 이날 오후 7시20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리는 한국과 이라크의 4강 대결을 보기 위해 집집마다 20∼30ℓ씩 석유를 구입해 자체 발전기를 가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라크는 전기 공급 사정이 좋지 않아 자주 정전이 발생하기 때문에 경기 시간에 맞춰 발전기를 돌리려는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은 설명했다.” 그놈의 전쟁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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