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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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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8-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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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내가 잘 아는 언니는 무좀이 있다. 고교 시절부터 있었다. 큰애가 초등 6학년이니 결혼한 지는 십수 년이 됐다. 언니의 남편은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딱 걸렸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휴일 낮 언니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느낌이 이상해 깨어보니 남편이 언제 돌아왔는지 언니의 발을 뚫어지게 보고 있더란다. 당황한 언니가 어버버버 하는 사이, 남편은 “자기, 이거, 발…” 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언니가 이실직고하려는 순간, 남편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절규했다. “나한테 옮은 거지, 미안해. 으허헝∼.” 그녀가 여우인 게 문제인지, 그가 곰인 게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 뒤로 언니의 삶이 훨씬 윤택해졌다는 사실이다.

전혀 아닐 것 같은 여자가 꽤 괜찮은 남자를 꿰차고 사는 모습을 가끔 본다. 돈을 잘 벌거나 미모가 빼어나거나 학식과 인품과 기타 등등이 훌륭한 것도 아닌데, 멀쩡한 남자를 헤벌레하게 만드는 여자들에겐, 뭐가 있긴 있다.


앞서의 남편은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줄 알았다”고 언니와의 첫 만남을 회상한다. 내가 아는 언니는 사나흘 머리 안 감는 건 기본, 무좀 걸린 발의 각질을 습관적으로 뜯어대고, 코딱지도 파서 아무 데나 던지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도 비상한 재주 하나는 갖고 있었으니, 바로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자기 정체를 남편에게는 들키지 않았다는 거다.

파트너와 만나던 초기, 나는 손톱 기르길 즐겼다. 캔 음료수의 꼭지를 따다 손톱을 부러뜨리곤 해 스스로 잘 따지 않았다. 한두 번 “이거 따줘” 했는데, 그는 그 뒤로 말 안 해도 따줬다. 나아가 한 입 먼저 입 안 대고 마신 뒤 내게 건네곤 했다. 혹시 묻어 있을지 모를 먼지를 없애는 거였다.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내 팔뚝이 그의 팔뚝보다 두꺼워지고도 이 습관은 이어졌다. 얼마 전 내가 맥주 캔을 따자, 그가 깜짝 놀랐다. “어, 딸 줄 알아?” 맹세코 내 입으로 손가락 힘이 없어서 캔 꼭지 못 딴다는 말을 한 적 없다. 자기가 그냥 그렇게 믿은 거다. 부럽다고? 이런 파트너가 인생에 꼭 도움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내 몸무게가 60kg이 넘어가는데도 “니가 뺄 데가 어딨냐”는 말로 오랫동안 나를 기만해, 나의 창창한 앞길을 가로막은 장본인이다.

최근 그와 마찬가지로 이 자가 과연 내 인생에 도움이 되나 안 되나 고민하게 만드는 남자를 발견했다. 우리 편집장이다. 현 편집장은 전 편집장과는 달리 기사를 요구하는 방식이 ‘변태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재간’이 많은데(이번에도 이름이 비슷하군), 가령 <한겨레21>에 실린 어떤 내용에 대해 “선배, 이 부분은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볼 때…” 말을 꺼내면 내용을 말하기도 전에 “어, 잘못했어”라고 한다. 그 다음은 짐작하시는 대로. 나는 “심각하게 문제가 있다”려던 것을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로 ‘톤 다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여우 같은 편집장 같으니라고. ‘어떤 유’의 상사와 일하는 여자들은 나보고 복 터졌다 할지 모르겠지만, 흠, 겪어보세요. (지면 사정상 이하 생략함.)

어쨌든 성질 나쁜 여자를 찍소리 못하게 하는 남자에게도, 뭐가 있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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