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가깝게 체중 감량하고 2007 아시안컵에 나섰던 골키퍼 이운재
▣ 쿠알라룸푸르=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거미손은 갑자기 돼지·뚱보로 불렸다. “뒤룩뒤룩 살찐 돼지가 무슨 골키퍼인가?” 비난은 노골적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 때보다 체중이 불어난 듯한 이운재(34)의 외모 탓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원 삼성에서도 2인자 박호진에게 주전 장갑을 뺏겼다. 교체 선수용 조끼를 입고 벤치에 우두커니 앉은 그의 모습. 낯설기까지 했다. 대표팀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지난해 일이었다.
96 올림픽 앞두고 무리하게 살 빼다 위기
“은퇴설까지 나오고, 경기도 못 뛰고…. 대한민국을 위해 뛸 때는 최고라고 하더니 좀 뛰지 못하니까 네티즌들이 그런 식으로 말할 때, 나도 사람이니까 욕도 좀 나오더라고요.” [%%IMAGE4%%] 그러곤 웃었다. “시즌이 끝난 뒤 오스트레일리아 프로축구에서 뛰는 친구 (서)혁수를 찾아갔죠. 바람 쐬며 마음을 추슬렀어요.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어디 이운재가 죽나 보자’라고. ‘내가 잘못했으니 그러겠지. 내가 부족한 게 뭔가’ 생각했죠. 먼저 90kg대였던 체중을 다시 80kg대로 빼보자고 했죠.” 물만 먹어도 찌는 체질이라던 그는 체중을 줄이려다 선수 생명에 위기가 다가온 적도 있었다. 1996 애틀랜타올림픽 대표팀 시절 “살을 빼야 뛰게 해주겠다”던 비쇼베츠 감독의 말에 그는 체중을 80∼81kg까지 낮췄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 식사를 많이 했는데도 73kg까지 계속 빠지더라고요. 다이빙 2∼3번 하면 힘들고, 밤에 1∼2시간 자면 땀으로 흠뻑 젖고, 머리도 어지럽고. 폐결핵이 2∼3기 중간으로 발전해 위험하다면서 운동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장갑을 벗었다. 물론 태극마크도 내놓았다. 96년 1년간 고향 청주에서 치료에만 전념했다. “그땐 신경이 날카로워 가족한테 못된 짓도 많이 했는데, 결혼 전이던 아내가 묵묵히 지켜봐준 게 고마웠죠.” 그는 은색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지난 4월 자신의 생일에 아내가 건네준 반지였다. “결혼 9주년째네요. 아직 둘이 신혼여행도 못 갔는데…. 결혼식 날 98 프랑스월드컵 한국-멕시코전이 열렸죠. 대표팀도 안 됐고, 팀에서 자리도 못 잡았을 때라…. 결혼하면 슬럼프에 빠진다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고. 토요일에 결혼하고 월요일 소속팀 훈련에 참가했어요. 다음에 신혼여행 가자는 말을 아내가 받아줬는데,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죠.” 지난 6월, 그는 쫙 달라붙는 옷을 입고 대표팀 소집에 응했다. 마치 ‘이제 내 몸을 보라’고 말하는 듯했다. 1년여 만에 대표팀 복귀였다. 그런 그의 왼팔에 노란색 주장 완장이 채워졌다. “47년 만에 아시안컵 우승에 도전하는 건데 선배로서 어린 선수들을 어떻게 이끌까, 그들의 가슴을 어떻게 하면 따뜻하게 만들고 운동장에서 열정을 불태우게 할 수 있나 고민이 많았죠.” 외신들 “어찌 그리 승부차기를 잘 막냐” 7월2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이란과의 2007 아시안컵 8강전. 승부차기에 앞서 그는 선수들을 불러모아 어깨를 결었다. 그는 이 경기에서 상대한테 머리를 맞아 쓰러지면서도 연장 120분간 골문을 꽁꽁 잠갔다. “‘얘들아, 정신력으로 이겨내자’고 했죠. 여기 와서도 계속 말했어요. ‘난 너희들이 최고이기에 여기 왔다고 생각한다. 자부심을 가져라. 그러나 내가 이 정도이니 그냥 되겠지 하는 자만심은 버려라’고.” 그가 승부차기에서 2골을 막고 삐걱대던 ‘핌 베어벡호’를 4강에 올려놓던 순간, 후배들이 달려들어 그와 한 덩어리로 섞였다. 외신 기자들은 “왜 그렇게 승부차기를 잘 막냐”며 궁금해했다. 이운재는 K리그에서도 승부차기 10번 중 9번을 이겼다. 총 46명의 키커 중 21명이 이운재 선방에 막히거나 그 기세에 눌려 엉뚱한 곳으로 찼다. “키커는 넣어야 본전이고, 난 막으면 박수를 받습니다. 부담은 내가 아니라 키커에게 더 있죠. 공이 날아오는 속도에 골키퍼의 반응 속도가 당할 수 없어요. 과학적으론 이길 수 없는 게임이란 거죠. 골대 구석으로 정확히 오면 꼼짝 못합니다. 그런데 키커도 마음 같지 않습니다. 다섯 명 중 실수가 나오거든요. 그 실수를 잡으려면 침착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키커의 어느 발이 움직이는지 끝까지 봐야 하는 거죠. 미리 움직이면 반대로 키커가 그걸 읽습니다.” 그는 이란전 승부차기 두 번째 선방을 예로 들었다. 넘어지면서 다리로 막은 이 선방은 인터넷상에서 ‘이운재 뒷다리 방어’로 화제가 됐다. “오른쪽으로 쓰러지려는데 공을 가운데로 후리는 걸 봤죠. 몸은 오른쪽으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공이 가운데로 오기에 다리를 비틀어 그쪽으로 쭉 뻗었죠.” 찰나와도 같은 시간. 기다리면 이긴다? 말처럼 쉬운가. “무조건 기다리면 되나요? 머리, 심리 싸움인데 상대를 미리 간파해야죠. 2002 부산아시아경기대회 4강전에서 이란과 승부차기를 해 졌는데, 그때 겪어보니 이란 선수들은 속이는 동작 없이 자기가 정한 곳으로 세게 차는 습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독기를 품었죠. 역시 이번에도 그렇게 하더군요.” 골키퍼는 집중력! 지나가는 번호판도 외워 그가 중학교 때까지 수비수였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체격은 좋은데 지구력이 떨어지는 그를 보고 청주상고 감독이 골키퍼를 권했다. “내 단점을 보완한 이 포지션이라면 많은 시간 경기에 나갈 수 있겠다 싶어 한다고 했죠.” 고등학교 1학년에 시작했는데 경희대 1학년 때 대표팀 골키퍼가 됐다. 고교 3년간 승부차기를 매일 100개씩 연습했더니 대학교 가서 공의 방향이 훤히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의 숨은 노력은 또 있다. “골키퍼에겐 집중력이 중요하죠. 제가 차를 타고 가면서 휙 지나가는 번호판과 간판을 외우려 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작은 공을 갖고 하는 탁구를 즐겨 하는 것도 늘 내 시야에 공을 담아두기 위해서입니다. 골키퍼는 순식간에 날아오는 공을 봐야 하기 때문이죠. 경기에서 잘못을 하기 마련인데 그땐 머릿속에서 실수를 빨리 지웁니다. 대신 다음날 운동장에서 훈련을 통해 왜 실수했는지를 몸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그는 11m 떨어진 키커와의 승부차기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이 축구에만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건 아쉽게 아시안컵 4강에 머문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얘기라고도 했다. “승부차기에서 이기려면 기다려야 하지만 기다리면서 뭘 준비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난 잘하는데 왜 안 주나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잘못한 건 고치고 땀을 흘려야 하는 거죠. 땀 흘리는 만큼 결과가 나오죠. 지난해 욕을 먹으면서 그걸 많이 느꼈거든요. 그렇게 뛰기 싫어하는 저도 10kg 가깝게 살을 뺏지 않았습니까?”
“은퇴설까지 나오고, 경기도 못 뛰고…. 대한민국을 위해 뛸 때는 최고라고 하더니 좀 뛰지 못하니까 네티즌들이 그런 식으로 말할 때, 나도 사람이니까 욕도 좀 나오더라고요.” [%%IMAGE4%%] 그러곤 웃었다. “시즌이 끝난 뒤 오스트레일리아 프로축구에서 뛰는 친구 (서)혁수를 찾아갔죠. 바람 쐬며 마음을 추슬렀어요.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어디 이운재가 죽나 보자’라고. ‘내가 잘못했으니 그러겠지. 내가 부족한 게 뭔가’ 생각했죠. 먼저 90kg대였던 체중을 다시 80kg대로 빼보자고 했죠.” 물만 먹어도 찌는 체질이라던 그는 체중을 줄이려다 선수 생명에 위기가 다가온 적도 있었다. 1996 애틀랜타올림픽 대표팀 시절 “살을 빼야 뛰게 해주겠다”던 비쇼베츠 감독의 말에 그는 체중을 80∼81kg까지 낮췄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 식사를 많이 했는데도 73kg까지 계속 빠지더라고요. 다이빙 2∼3번 하면 힘들고, 밤에 1∼2시간 자면 땀으로 흠뻑 젖고, 머리도 어지럽고. 폐결핵이 2∼3기 중간으로 발전해 위험하다면서 운동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장갑을 벗었다. 물론 태극마크도 내놓았다. 96년 1년간 고향 청주에서 치료에만 전념했다. “그땐 신경이 날카로워 가족한테 못된 짓도 많이 했는데, 결혼 전이던 아내가 묵묵히 지켜봐준 게 고마웠죠.” 그는 은색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지난 4월 자신의 생일에 아내가 건네준 반지였다. “결혼 9주년째네요. 아직 둘이 신혼여행도 못 갔는데…. 결혼식 날 98 프랑스월드컵 한국-멕시코전이 열렸죠. 대표팀도 안 됐고, 팀에서 자리도 못 잡았을 때라…. 결혼하면 슬럼프에 빠진다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고. 토요일에 결혼하고 월요일 소속팀 훈련에 참가했어요. 다음에 신혼여행 가자는 말을 아내가 받아줬는데,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죠.” 지난 6월, 그는 쫙 달라붙는 옷을 입고 대표팀 소집에 응했다. 마치 ‘이제 내 몸을 보라’고 말하는 듯했다. 1년여 만에 대표팀 복귀였다. 그런 그의 왼팔에 노란색 주장 완장이 채워졌다. “47년 만에 아시안컵 우승에 도전하는 건데 선배로서 어린 선수들을 어떻게 이끌까, 그들의 가슴을 어떻게 하면 따뜻하게 만들고 운동장에서 열정을 불태우게 할 수 있나 고민이 많았죠.” 외신들 “어찌 그리 승부차기를 잘 막냐” 7월2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이란과의 2007 아시안컵 8강전. 승부차기에 앞서 그는 선수들을 불러모아 어깨를 결었다. 그는 이 경기에서 상대한테 머리를 맞아 쓰러지면서도 연장 120분간 골문을 꽁꽁 잠갔다. “‘얘들아, 정신력으로 이겨내자’고 했죠. 여기 와서도 계속 말했어요. ‘난 너희들이 최고이기에 여기 왔다고 생각한다. 자부심을 가져라. 그러나 내가 이 정도이니 그냥 되겠지 하는 자만심은 버려라’고.” 그가 승부차기에서 2골을 막고 삐걱대던 ‘핌 베어벡호’를 4강에 올려놓던 순간, 후배들이 달려들어 그와 한 덩어리로 섞였다. 외신 기자들은 “왜 그렇게 승부차기를 잘 막냐”며 궁금해했다. 이운재는 K리그에서도 승부차기 10번 중 9번을 이겼다. 총 46명의 키커 중 21명이 이운재 선방에 막히거나 그 기세에 눌려 엉뚱한 곳으로 찼다. “키커는 넣어야 본전이고, 난 막으면 박수를 받습니다. 부담은 내가 아니라 키커에게 더 있죠. 공이 날아오는 속도에 골키퍼의 반응 속도가 당할 수 없어요. 과학적으론 이길 수 없는 게임이란 거죠. 골대 구석으로 정확히 오면 꼼짝 못합니다. 그런데 키커도 마음 같지 않습니다. 다섯 명 중 실수가 나오거든요. 그 실수를 잡으려면 침착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키커의 어느 발이 움직이는지 끝까지 봐야 하는 거죠. 미리 움직이면 반대로 키커가 그걸 읽습니다.” 그는 이란전 승부차기 두 번째 선방을 예로 들었다. 넘어지면서 다리로 막은 이 선방은 인터넷상에서 ‘이운재 뒷다리 방어’로 화제가 됐다. “오른쪽으로 쓰러지려는데 공을 가운데로 후리는 걸 봤죠. 몸은 오른쪽으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공이 가운데로 오기에 다리를 비틀어 그쪽으로 쭉 뻗었죠.” 찰나와도 같은 시간. 기다리면 이긴다? 말처럼 쉬운가. “무조건 기다리면 되나요? 머리, 심리 싸움인데 상대를 미리 간파해야죠. 2002 부산아시아경기대회 4강전에서 이란과 승부차기를 해 졌는데, 그때 겪어보니 이란 선수들은 속이는 동작 없이 자기가 정한 곳으로 세게 차는 습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독기를 품었죠. 역시 이번에도 그렇게 하더군요.” 골키퍼는 집중력! 지나가는 번호판도 외워 그가 중학교 때까지 수비수였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체격은 좋은데 지구력이 떨어지는 그를 보고 청주상고 감독이 골키퍼를 권했다. “내 단점을 보완한 이 포지션이라면 많은 시간 경기에 나갈 수 있겠다 싶어 한다고 했죠.” 고등학교 1학년에 시작했는데 경희대 1학년 때 대표팀 골키퍼가 됐다. 고교 3년간 승부차기를 매일 100개씩 연습했더니 대학교 가서 공의 방향이 훤히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의 숨은 노력은 또 있다. “골키퍼에겐 집중력이 중요하죠. 제가 차를 타고 가면서 휙 지나가는 번호판과 간판을 외우려 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작은 공을 갖고 하는 탁구를 즐겨 하는 것도 늘 내 시야에 공을 담아두기 위해서입니다. 골키퍼는 순식간에 날아오는 공을 봐야 하기 때문이죠. 경기에서 잘못을 하기 마련인데 그땐 머릿속에서 실수를 빨리 지웁니다. 대신 다음날 운동장에서 훈련을 통해 왜 실수했는지를 몸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그는 11m 떨어진 키커와의 승부차기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이 축구에만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건 아쉽게 아시안컵 4강에 머문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얘기라고도 했다. “승부차기에서 이기려면 기다려야 하지만 기다리면서 뭘 준비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난 잘하는데 왜 안 주나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잘못한 건 고치고 땀을 흘려야 하는 거죠. 땀 흘리는 만큼 결과가 나오죠. 지난해 욕을 먹으면서 그걸 많이 느꼈거든요. 그렇게 뛰기 싫어하는 저도 10kg 가깝게 살을 뺏지 않았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