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와 축구선수가 동시에 원정 갔던 땅, 베트남을 추억하다
▣ 신명철 <스포츠 2.0> 편집위원
1970년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메르데카배 국제축구대회에서 처음으로 단독 우승한 축구대표팀은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해 김포가도와 신촌, 서소문을 거쳐 서울시청 앞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였다.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벌어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박신자를 앞세워 준우승한 여자농구대표팀도 같은 코스를 따라 카 퍼레이드를 했다. 비단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단만이 이 코스에서 카 퍼레이드를 펼친 건 아니다.
존슨 대통령 위해서도 꽃종이는 날리고
미국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동남아시아 6개국 순방을 마치고 1966년 10월31일 대통령 전용기편으로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존슨 대통령은 공항에서 박정희 대통령 부부의 환영을 받고, 3군과 해병대 의장대를 사열했다. 그리고 앞의 코스를 따라 카 퍼레이드를 하고 서울시청 앞에서 개최된 서울시민 환영행사에 참석했다. 이 카 퍼레이드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20층 안팎의 빌딩들이 줄지어 서 있는 서소문로였다. 카 퍼레이드가 지나갈 때에는 온갖 색깔의 꽃종이가 빌딩에서 뿌려졌다.
서소문로 빌딩가는 삼일고가도로와 함께 1960, 70년대 조국의 번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존슨 대통령은 방한 기간 경제, 사회 및 과학 분야의 발전을 위해 한국을 계속 지원할 것과 함께 주한미군을 감축하지 않고 한국에 대한 무력 공격이 있을 때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원조를 약속했다. 존슨 대통령의 이같은 약속은 베트남전 파병에 따른 안보 불안감을 떨쳐버리는 한편, 5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40여 년 전 한국 축구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열린 대회에서 우승해도 국빈이 달리는 코스로 카 퍼레이드를 했다. 타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버마 그리고 월남(남베트남)은 그 시절 한국과 자주 경기를 한 호적수들이었다. 이 나라들 가운데 특히 남베트남은 한국과 특별한 관계였다. 육군 소장 박정희는 1961년 5월16일 일단의 영관급 장교를 이끌고 군사반란에 성공한 뒤, 그해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존슨 대통령의 전임자인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 문제를 거론했다. 그로부터 3년여 뒤인 1963년 9월 의무부대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이 남베트남의 붕따우에 발을 디딘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 중인 남베트남에서의 축구 경기
1949년 한국 축구 대표팀은 정부 수립 뒤 처음으로 국제대회 출전이 아닌 친선경기를 위해 해외 원정에 나섰다. 원정지는 홍콩과 베트남이었다. 선수단은 그해 12월19일 부산으로 내려가 동래에서 합숙훈련을 하다 12월25일 홍콩 선적의 화물선을 타고 부산항을 떠났다. 엿새 뒤 홍콩에 도착한 선수단은 이듬해 1월1일부터 시작한 홍콩팀과의 네 차례 친선경기에서 2승2패를 기록했다. 선수단은 1월12일 에어프랑스편으로 사이공에 도착했다. 그때 베트남은 몹시 어수선했다.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은 프랑스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고, 친선경기가 예정돼 있던 사이공 시내에서도 총소리가 자주 들렸다. 한국은 1월15일 열린 베트남 대표팀과의 1차전에서는 4-2로 이겼고, 2차전은 3-3으로 비겼다.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의 나라별 역대 전적을 보면 베트남과의 두 번째 경기가 두 나라 사이의 첫 번째 A매치로 올라 있다. 한국은 3차전에서 프랑스군 선발팀을 5-0으로 크게 이겼다. 축구선수로 뛴 프랑스 군인이 포함돼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프랑스군은 이로부터 5년여 뒤인 1954년 5월 북베트남의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민군의 포위 공격에 항복했고, 결국 식민지 베트남에서 영원히 손을 뗐다. 한국과 베트남은 60여 년 전에 이렇게 축구를 통해 만나고 있었다.
1964년 공병부대인 비둘기부대에 이어 1965년 9월 전투부대인 맹호부대가 남베트남의 퀴년에 상륙하면서 한국군은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그 무렵 한국은 또다시 축구로 베트남과 만난다. 한국은 1964년 6월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서 열린 그해 도쿄올림픽(1964년 10월10∼24일)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2-2로 비겼다. 그러나 한국은 5월에 치른 서울 홈경기에서 3-0으로 이겨 도쿄올림픽 출전권을 얻었다. 1967년 11월에는 역시 사이공에서 벌어진 베트남 독립기념일대회에서 3-0으로 완승했다. 한국은 1960년대에만 각종 국제축구대회에서 10번이나 만났는데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남베트남에서 경기를 한 것은 두 차례다.
특히 1967년 11월 경기는 남북을 가리지 않고 베트남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을 때다. 미국은 디엔비엔푸전투 때는 군사고문단만 있었지만 1965년 8월 ‘똥낑만 사건’ 이후 북베트남을 폭격하는 등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고 있었다. 한국 선수들이 남베트남과 경기를 한 지 불과 3개월 뒤 베트콩의 ‘구정(舊正) 공세’로 사이공의 경우 대통령궁과 남베트남 주재 미국대사관 등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1975년 4월30일 베트남전은 끝났고 통일 베트남이 탄생했다.
역사의 아픔 딛고 스포츠로 어우러져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96년 8월 한국 축구는 다시 베트남을 찾았다. 이제는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찌민으로 이름을 바꾼, 결코 낯설지 않은 곳에서 제1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예선을 치러 4-0(득점자 신태용·노상래·박태하·서효원)으로 크게 이겼다. 베트남은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르는 동안 스포츠도 많이 약해진 듯했다. 그러나 2003년 10월19일 한국은 베트남에 불의의 일격을 맞았다. 오만에서 열린 제13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2차 예선에서 0-1로 진 것. 한국은 이틀 뒤 오만에 또다시 1-3으로 졌다. 2002년 한·일 월드컵대회에서 4강에 올라 우쭐하던 한국 축구였으니 ‘오만 쇼크’라고 부를 만했다.
베트남은 제14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공동개최국으로 조별 리그 B에 들어 1승1무1패로 2승1무의 일본에 이어 조 2위로 8강에 올랐다. 이같은 결과는 2002-2003 시즌에 출범한 프로축구 리그인 ‘V리그’와 무관하지 않다. 프로스포츠는 베트남이 도이모이(개혁·개방) 정책을 펴기 전인 1980년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베트남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태권도 여자 57kg급에서 트란 히에우 응안이 베트남 스포츠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인 은메달을 땄다. 37년 전 남베트남 땅에 발을 디딘 태권도는 전쟁의 아픈 기억을 씻고 있는 베트남에 올림픽 메달이라는 값진 선물을 안겼다. 한국과 베트남은 축구와 태권도를 통해 역사의 아픔을 딛고 어울리고 있다.

2006년 12월3일에 열린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한국-베트남의 예선 경기에서 정조국 선수가 베트남 선수와 공중볼 다툼을 벌이고 있다.(사진/ 연합 전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