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한한 풍속만으론 대체할 수 없는 역사, 염상섭의 <삼대>에 담겼네
▣ 태풍클럽 출판사 편집자
요사이 ‘근대’, 정확히 말하면 식민지 시대가 인기다. 식민지 시대를 소재로 한 소설과 평론, 역사서 등이 몇 년 전부터 조금씩 등장하더니, 이젠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본격적으로 ‘모던 뽀이’들과 ‘보던 가루’들이 ‘경성’을 누빈다. 아, 그렇다. 우리에게도 샤넬을 입고 새치름한 보브 커트로 뉴욕을 누비던 댄서 최승희가 있었고, 플래퍼 드레스를 입고 동경을 주름잡은 조종사 박경원이 있었다. 이제, 위안부와 강제노역, 가난 같은 저개발의 구질구질한 기억들 대신 우리도 뭔가 쌈박하고 세련된 과거를 갖게 된 것이다.
소설에서 풍속이 차지하는 위치는 생각 이상으로 크다. 특히 대부분의 시대물이나 역사소설에서 풍속 묘사는 읽는 맛을 좌우하는 절대적 요소다. 식민지 시대의 이러한 ‘새로운’ 기억들은 이제 각종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서 서사의 빈자리를 메워주고 있다. 그러나 공중누각에 앉은 듯, 어딘가 허전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역사를 ‘탈’(脫)했다는 송구함 없이 식민지 서사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그 시대에 쓰인 소설을 읽는 것이다. 염상섭의 <삼대>는 위와 같은 맥락을 다 빼고라도 우리 문학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백미이자 고전이다. 일단 요새 한국 소설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서사’에 대한 아쉬움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정도로 흡입력 넘치는 이야기에, 깍쟁이 같은 경기 사투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식민 시대 중산층의 가장 리얼한 풍속도를 만날 수 있다. 내용은 간단하다. 조의관, 조상훈, 조덕기의 조씨 일가 삼대로 이어지는 부(富)와 그 행방을 둘러싼 인간군상을 다룬, 어찌 보면 아침 드라마 같기도 한 이야기다. 하지만 미혼모 모던 걸 홍경애, 스마트한 교토 유학생 조덕기, 룸펜 ‘마르크스 보이’ 김병화, 타락한 ‘여학생’ 김의경 등 당대의 생생한 인물들은 금세라도 책갈피 밖으로 뛰쳐나올 듯하다. 홍경애의 아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김병화와 홍경애의 대화를 들어보자. “자식이라니? 아기가 있소?” “왜, 동정녀 마리아도 아이를 낳는데 나는 혼잣몸이라고 아이 못 낳을까? 둘이 만드는 것보다 혼자 만드는 게 더 용하고 현대적이라우.” 이렇게 생경하면서도 맛깔스러운 언어보다도, 지금의 우리에겐 이국적이기까지 한 풍속도보다도 <삼대>에서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사회주의, 식민통치, 사회적 분배 등 당시로서는 목숨이 왔다갔다 할 주제를 소화해내는 염상섭의 세련됨과 치밀함이다. 물론 소설이 신문에 연재되던 1931년은 태평양전쟁 말기처럼 문인에 대한 핍박과 회유가 심하지 않았고, 조선총독부가 나름 ‘문화정치’를 펼치던 시절이라 하나, 그래도 경찰력은 계속 확대돼갔고 사회주의자 및 민족주의자에 대한 일본 경찰의 고문과 탄압은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다. 그런 시대에도 <삼대>에 등장하는 아나키스트, 테러리스트, 마르크시스트 등의 각종 ‘주의자’들은 바바리코트 휘날리는 폼 나는 간판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줄다리기 연애를 하고, 좀스러운 장사를 하고, 돈 때문에 비굴해지는 피와 살이 있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이렇게 어떤 특정 서사가 유행이 될 때, 더구나 그것이 지금 현재로서는 상상의 영역일 수밖에 없을 때, 중요한 것은 결국 얼마나 화려한 세트를 꾸미고 얼마나 기발한 형식적 장치들을 동원했는지가 아니라, 그 시대의 정신을 얼마나 치열하게 담아냈는가 하는 것이다. ‘피죤’ 담배의 희한한 풍속만으로 역사를 대체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권남희)
소설에서 풍속이 차지하는 위치는 생각 이상으로 크다. 특히 대부분의 시대물이나 역사소설에서 풍속 묘사는 읽는 맛을 좌우하는 절대적 요소다. 식민지 시대의 이러한 ‘새로운’ 기억들은 이제 각종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서 서사의 빈자리를 메워주고 있다. 그러나 공중누각에 앉은 듯, 어딘가 허전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역사를 ‘탈’(脫)했다는 송구함 없이 식민지 서사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그 시대에 쓰인 소설을 읽는 것이다. 염상섭의 <삼대>는 위와 같은 맥락을 다 빼고라도 우리 문학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백미이자 고전이다. 일단 요새 한국 소설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서사’에 대한 아쉬움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정도로 흡입력 넘치는 이야기에, 깍쟁이 같은 경기 사투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식민 시대 중산층의 가장 리얼한 풍속도를 만날 수 있다. 내용은 간단하다. 조의관, 조상훈, 조덕기의 조씨 일가 삼대로 이어지는 부(富)와 그 행방을 둘러싼 인간군상을 다룬, 어찌 보면 아침 드라마 같기도 한 이야기다. 하지만 미혼모 모던 걸 홍경애, 스마트한 교토 유학생 조덕기, 룸펜 ‘마르크스 보이’ 김병화, 타락한 ‘여학생’ 김의경 등 당대의 생생한 인물들은 금세라도 책갈피 밖으로 뛰쳐나올 듯하다. 홍경애의 아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김병화와 홍경애의 대화를 들어보자. “자식이라니? 아기가 있소?” “왜, 동정녀 마리아도 아이를 낳는데 나는 혼잣몸이라고 아이 못 낳을까? 둘이 만드는 것보다 혼자 만드는 게 더 용하고 현대적이라우.” 이렇게 생경하면서도 맛깔스러운 언어보다도, 지금의 우리에겐 이국적이기까지 한 풍속도보다도 <삼대>에서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사회주의, 식민통치, 사회적 분배 등 당시로서는 목숨이 왔다갔다 할 주제를 소화해내는 염상섭의 세련됨과 치밀함이다. 물론 소설이 신문에 연재되던 1931년은 태평양전쟁 말기처럼 문인에 대한 핍박과 회유가 심하지 않았고, 조선총독부가 나름 ‘문화정치’를 펼치던 시절이라 하나, 그래도 경찰력은 계속 확대돼갔고 사회주의자 및 민족주의자에 대한 일본 경찰의 고문과 탄압은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다. 그런 시대에도 <삼대>에 등장하는 아나키스트, 테러리스트, 마르크시스트 등의 각종 ‘주의자’들은 바바리코트 휘날리는 폼 나는 간판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줄다리기 연애를 하고, 좀스러운 장사를 하고, 돈 때문에 비굴해지는 피와 살이 있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이렇게 어떤 특정 서사가 유행이 될 때, 더구나 그것이 지금 현재로서는 상상의 영역일 수밖에 없을 때, 중요한 것은 결국 얼마나 화려한 세트를 꾸미고 얼마나 기발한 형식적 장치들을 동원했는지가 아니라, 그 시대의 정신을 얼마나 치열하게 담아냈는가 하는 것이다. ‘피죤’ 담배의 희한한 풍속만으로 역사를 대체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