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노예해방 후의 혼란 그린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만덜레이>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만덜레이>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미국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3부작 첫 번째 작품인 <도그빌>(Dogville)의 불타는 ‘도그빌’을 떠나온 그레이스(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는 앨라배마의 작은 마을 ‘만덜레이’를 지난다. 그레이스에게 숨겨진 비밀이 있듯이 마을에도 이상한 현실이 있다. 이미 70년 전에 폐지된 노예제가 아직도 만덜레이에서는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갱단인 아버지의 무력을 빌려 백인 주인을 무장해제하고, 만덜레이 노예들을 해방시킨다. <만덜레이>는 ‘대략’ 이렇게 그레이스가 채찍을 빼앗는 일에서 시작해 결국은 스스로 채찍을 휘두르는 일로 끝난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자유민들은 몇 시에 밥을 먹나요? 주어진 자유는 기쁨이기보다는 근심이다. 현명한 흑인노인 윌햄(대니 글로버)조차 묻는다. “노예들은 7시에 식사를 하는데, 자유민들은 몇 시에 먹나요?” 만덜레이에 남아서 그들과 함께하기로 결심한 ‘착한’ 그레이스는 이처럼 낯선 질문에 망설이면서 “배고플 때 먹는다”고 답하지만, 그것은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더구나 해방된 노예들은 해방시킨 그레이스를 신뢰하지 않는다. 자존심 강한 노예 티모시(이삭 드 번콜)처럼 “흑인 구제를 취미로 삼는 귀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비아냥대는 부류도 있다. 그래도 그레이스는 백인 주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해방된 노예들에게 분배한다. 예전의 노예가 농장의 주주가 되는 일종의 ‘공동 소유’ 실험이 시작되지만, 성공은 어렵다. 이제 누가 시키지 않으니 아무도 나서서 일하려 하지 않는다. 목화씨를 뿌릴 시기가 왔지만 모두가 태연히 지나치고, 천장에 구멍이 생겨서 비가 새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 “피부에 와닿는 혜택”이 없는 탓이다. 불행히도 여기서도 공동체는 공동의 적에 맞서며 탄생한다. 모래 바람이 몰려와 어렵게 파종한 목화 새싹이 모래에 덮이는 위기가 닥친다. 이렇게 모래 바람이라는 공동의 적은 공동체에 전화위복의 계기를 준다. 모두가 스스로 나가서 일하는, 공동체의 가능성이 시작된다. 이제 그레이스는 그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친다. 투표의 필요성, 분노를 표출하는 법을 가르친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가르친 민주주의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분노는 사적인 복수를 계기로만 표출되고, 투표는 감정에 휘둘린다. 결국엔 그레이스가 가르친 투표가 그레이스의 발목을 잡는다. 한편으로 ‘마님의 법칙’으로 불리는 노예들을 7등급으로 나누어 분리통치하는 방법도 영화의 반전을 만드는 중요한 계기로 나온다. 그레이스는 자존심 강한 1등급 노예로 분류된 티모시에게 반하지만, 그레이스의 ‘판타지’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렇게 <만덜레이>는 미국 역사의 아킬레스건인 노예제를 현재형으로 되살려놓고, 노예해방 이후에도 지속되는 자유의 혼란과 모순을 다룬다. 혁명에 대한 풍자, 인간에 대한 비판 사실은 그레이스 자체가 모순적 존재다. 당초에 그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그의 해방은 일종의 무장한 혁명이다. 갱단의 두목인 아버지가 나눠준 부하들의 무력이 권력의 근원인 것이다. 노예를 해방시킨 이후에도 자유를 가르치는 통치자라는 모순이 그의 정체다. 역시나 그레이스는 민주주의를 설파하지만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는 어렵다. 개인들은 민주주의를 사적인 복수의 수단으로 포장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국가의 직유법으로 그레이스의 존재는 사적인 복수를 금하고, 자신이 단죄의 집행자로 나서는 모습에서도 보인다. 그리하여 <만덜레이>는 미국에 대한 조소에만 머물지 않고 혁명에 대한 풍자, 인간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그레이스를 링컨이 아니라 볼셰비키로, 노예를 흑인이 아니라 민중으로 놓아도 영화는 성립한다. 이렇게 읽으면 “미국만 나쁘다”는 편안한 면죄부에서 벗어나 보편적 인간의 문제로 확장된 <만덜레이>가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추수의 기쁨이 넘치고, 해방된 노예가 진정한 미국인 혹은 자유인이 될 무렵에 반전이 시작된다. <만덜레이>는 영원한 불평등 대신에 스스로 부자유를 선택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들의 목소리로 자유를 설파하는 자들이 모르는(혹은 무시하는) 부자유의 자유를 말한다. 그리고 그레이스의 행적을 통해 자유를 ‘베푸는’ 자들의 오만과 한계를 조롱한다. <만덜레이>는 자유의 여신인 그레이스가 자신이 설파한 자유의 원리에 따라서 자유를 박탈당하고, 통치를 강요당하는 지경까지 나아간다. 자막 아래 사진까지 봐야 끝나는 영화 <만덜레이>의 영화적 형식은 <도그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분필로 그린 세트, 독설을 내뿜는 내레이션, 흔들리는 카메라, <도그빌>에서 시도한 형식의 뼈대가 여전하다. 이렇게 연극적 장치에도 영화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촌철살인의 내레이션은 반전을 암시하고, 간단한 무대장치는 장면의 전환을 쉽게 만들어 이야기의 흐름을 빠르게 밀고 간다. 여기에 음악은 화면에 리듬을 불어넣는다. <만덜레이>는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보아야 영화가 끝나는 영화다. 데이비드 보위의 <영 아메리칸>이 흐르는 가운데 자막 아래로 보이는 사진들은 어제도 존재했고, 오늘도 계속되는 ‘아메리카’의 인종차별 현실을 웅변한다. 2005년 칸영화제 본선 진출작인 <만덜레이>는 7월26일 개봉한다. 미국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워싱턴>은 2009년 공개될 예정이다.

그레이스는 해방된 노예들에게 투표하는 법, 분노를 표출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결국에 잘못 작동하는 민주주의는 그레이스의 발목을 잡는다.
자유민들은 몇 시에 밥을 먹나요? 주어진 자유는 기쁨이기보다는 근심이다. 현명한 흑인노인 윌햄(대니 글로버)조차 묻는다. “노예들은 7시에 식사를 하는데, 자유민들은 몇 시에 먹나요?” 만덜레이에 남아서 그들과 함께하기로 결심한 ‘착한’ 그레이스는 이처럼 낯선 질문에 망설이면서 “배고플 때 먹는다”고 답하지만, 그것은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더구나 해방된 노예들은 해방시킨 그레이스를 신뢰하지 않는다. 자존심 강한 노예 티모시(이삭 드 번콜)처럼 “흑인 구제를 취미로 삼는 귀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비아냥대는 부류도 있다. 그래도 그레이스는 백인 주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해방된 노예들에게 분배한다. 예전의 노예가 농장의 주주가 되는 일종의 ‘공동 소유’ 실험이 시작되지만, 성공은 어렵다. 이제 누가 시키지 않으니 아무도 나서서 일하려 하지 않는다. 목화씨를 뿌릴 시기가 왔지만 모두가 태연히 지나치고, 천장에 구멍이 생겨서 비가 새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 “피부에 와닿는 혜택”이 없는 탓이다. 불행히도 여기서도 공동체는 공동의 적에 맞서며 탄생한다. 모래 바람이 몰려와 어렵게 파종한 목화 새싹이 모래에 덮이는 위기가 닥친다. 이렇게 모래 바람이라는 공동의 적은 공동체에 전화위복의 계기를 준다. 모두가 스스로 나가서 일하는, 공동체의 가능성이 시작된다. 이제 그레이스는 그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친다. 투표의 필요성, 분노를 표출하는 법을 가르친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가르친 민주주의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분노는 사적인 복수를 계기로만 표출되고, 투표는 감정에 휘둘린다. 결국엔 그레이스가 가르친 투표가 그레이스의 발목을 잡는다. 한편으로 ‘마님의 법칙’으로 불리는 노예들을 7등급으로 나누어 분리통치하는 방법도 영화의 반전을 만드는 중요한 계기로 나온다. 그레이스는 자존심 강한 1등급 노예로 분류된 티모시에게 반하지만, 그레이스의 ‘판타지’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렇게 <만덜레이>는 미국 역사의 아킬레스건인 노예제를 현재형으로 되살려놓고, 노예해방 이후에도 지속되는 자유의 혼란과 모순을 다룬다. 혁명에 대한 풍자, 인간에 대한 비판 사실은 그레이스 자체가 모순적 존재다. 당초에 그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그의 해방은 일종의 무장한 혁명이다. 갱단의 두목인 아버지가 나눠준 부하들의 무력이 권력의 근원인 것이다. 노예를 해방시킨 이후에도 자유를 가르치는 통치자라는 모순이 그의 정체다. 역시나 그레이스는 민주주의를 설파하지만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는 어렵다. 개인들은 민주주의를 사적인 복수의 수단으로 포장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국가의 직유법으로 그레이스의 존재는 사적인 복수를 금하고, 자신이 단죄의 집행자로 나서는 모습에서도 보인다. 그리하여 <만덜레이>는 미국에 대한 조소에만 머물지 않고 혁명에 대한 풍자, 인간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그레이스를 링컨이 아니라 볼셰비키로, 노예를 흑인이 아니라 민중으로 놓아도 영화는 성립한다. 이렇게 읽으면 “미국만 나쁘다”는 편안한 면죄부에서 벗어나 보편적 인간의 문제로 확장된 <만덜레이>가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추수의 기쁨이 넘치고, 해방된 노예가 진정한 미국인 혹은 자유인이 될 무렵에 반전이 시작된다. <만덜레이>는 영원한 불평등 대신에 스스로 부자유를 선택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들의 목소리로 자유를 설파하는 자들이 모르는(혹은 무시하는) 부자유의 자유를 말한다. 그리고 그레이스의 행적을 통해 자유를 ‘베푸는’ 자들의 오만과 한계를 조롱한다. <만덜레이>는 자유의 여신인 그레이스가 자신이 설파한 자유의 원리에 따라서 자유를 박탈당하고, 통치를 강요당하는 지경까지 나아간다. 자막 아래 사진까지 봐야 끝나는 영화 <만덜레이>의 영화적 형식은 <도그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분필로 그린 세트, 독설을 내뿜는 내레이션, 흔들리는 카메라, <도그빌>에서 시도한 형식의 뼈대가 여전하다. 이렇게 연극적 장치에도 영화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촌철살인의 내레이션은 반전을 암시하고, 간단한 무대장치는 장면의 전환을 쉽게 만들어 이야기의 흐름을 빠르게 밀고 간다. 여기에 음악은 화면에 리듬을 불어넣는다. <만덜레이>는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보아야 영화가 끝나는 영화다. 데이비드 보위의 <영 아메리칸>이 흐르는 가운데 자막 아래로 보이는 사진들은 어제도 존재했고, 오늘도 계속되는 ‘아메리카’의 인종차별 현실을 웅변한다. 2005년 칸영화제 본선 진출작인 <만덜레이>는 7월26일 개봉한다. 미국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워싱턴>은 2009년 공개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