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교실에서 만났던 그들… 섬세한 연출로 한층 자극되는 노스탤지어
지난해 가을부터 쏟아진 어설픈 대작영화와 강추위를 녹이기에는 너무나 미적지근했던 멜로영화의 폭설이 잦아든 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는 영화 한편이 등장했다. 대작과 멜로영화에 식상한 관객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영화 <친구>는 한동안 주춤했던 한국판 액션영화, 즉 주먹과 회칼, 그리고 의리로 무장한 깡패영화의 재래를 비장하게 선포한다.
친구 4명의 엇갈리는 길
그러나 <친구>가 관객을 매혹하는 이유는 단순히 장동건의 강렬한 눈빛과 유오성의 거침없는 액션만은 아니다. 구름처럼 흰 연기를 뿜어내는 소독차의 뒤를 따라가는 아이들로 첫장면을 여는 이 영화는 빛바랜 어린 시절 기억의 조각보를 이어 맞추며 ‘어른이 되어버린’ 관객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문을 슬며시 연다.
준석(유오성)과 동수(장동건), 상택(서태화)과 중호(정운택). 벌거숭이로 커다란 타이어 튜브 하나에 매달려 물장구를 치던 열세살 소년들은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함께 <플레이보이> 핀업걸의 젖가슴을 더듬고 이소룡의 날렵한 폼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자신들의 미래가 서로 다른 길을 향해 갈라질 수밖에 없다는 걸. 까마귀 교복의 고등학생이 됐을 때 이미 이들은 모두 서로가 ‘가지 않은 길’을 엇갈려 밟고 있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상택은 모범생이었지만 아버지가 폭력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준석은 학교의 ‘통’(짱)으로, 미래도 자존심도 약속해주지 못하는 장의사 아버지를 둔 동수는 준석의 오른팔이 됐다. 하지만 이때 이들은 여고 축제에 가서 노래하는 소녀를 보면 같은 박자로 가슴이 쿵쾅거리는 열여덟살이었다. 쌍소리에 주먹질을 해대는 교사에 대한 분노와 친구를 위해 대책없이 몸을 던지는 동네 패싸움은 이들을 여전히 한동아리로 묶었다. 그러나 스무살, 상택과 중호는 대학생이 됐지만 준석은 방 안에서도 사시나무 떨듯 떠는 마약중독자가 됐고, 동수는 수감중이었다. 함께 촌스런 사진첩을 보며 낄낄거리기엔 이들은 너무 멀리 떨어진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리고 20대 중반이 됐을 때 준석과 동수는 각각 다른 조직의 행동대장이 되어 서로의 심장에 칼을 겨누는 ‘친구’가 된다. 〈Come Back〉, 〈Call Me〉 등 그 시절 일탈의 장소였던 ‘롤라장’(롤러스케이트장)에 울려퍼지는 댄스음악, 얼룩 교련복에 핀컬 파마, 툭하면 머리를 가격하는 흉기로 둔갑했던 커다란 출석부. <친구>는 말 그대로 친하고(親), 오래된(舊) 것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호출해낸다. 우리는 <친구>를 통해서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만나는 것이다. 또한 <친구>는 60년대부터 끊일 듯 끊일 듯 이어지면서도 관객에게 강한 임팩트를 남긴 깡패영화가 왜 오늘날까지 여전히 우리의 친구로 남아 있는지 설명한다. 이 영화에서 상택은 관찰자이자 진술자인 동시에 관객 자신이기도 하다. 서른을 넘긴 남자 관객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교실에서는 언제나 맨 뒤에서 인생 포기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도 참을 수 없는 교사의 행패에 눈을 부라리고, 껄떡대는 양아치를 한 주먹에 날리며, 때로는 힘없는 동급생을 보호해주기도 하는 그 친구를. 이름 석자 대신 깡패라는 명찰을 달고 다니며 우리에게 공포와 함께 한없는 동경의 설렘을 심어놓은 그 친구를. 고등학생이 된 상택과 준석, 동수는 일상을 공유할 수 없을 만큼 멀어졌지만 건달들에게 위협받는 상택 앞에 불현듯 나타난 준석과 동수는 건달들을 ‘반쯤 죽여놓는’ 우정을 발휘한다. 갱스터는 태어나고 깡패는 만들어진다
담배를 꼬나물고, 교사에게도 대드는 이들은 상택에게 두렵지만 멋진 친구들이다. 상택과 비슷한 성장의 과정을 겪은, 평범한 관객은 이 영화를 통해 영웅, 혹은 반영웅인 스크린 속 가상의 인물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상택)의 회고를 통해서,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 때로 나의 친구이며 때로 나의 영웅이기도 했던 ‘그’를 만나는 것이다.
서구의 깡패영화라고 할 수 있는 갱스터영화와 한국의 깡패영화가 가지는 차이, 그리고 갱스터영화에 느끼는 미국인들의 애정보다 깡패영화에 한국인들이 주는 애정이 더욱 농밀한 것은 이런 이유다. 갱스터영화에서 자주 등장한 알 카포네는 극악한 반영웅임에도 불구하고 소시민들에게 영웅보다 더한 매력으로 다가왔지만 그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영웅이었다. 그러나 준석 같은 깡패는 먼 영웅이 아니다. 그는 바로 내 옆에 있었고, 무섭기는 하지만 이따금씩 함께 장난질도 했던 그런 ‘친구’다. 이를테면 갱스터는 태어나는 것이지만 깡패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탈리아 시실리섬 이민자의 집단의 마피아 계보를 펼친 <대부>처럼 미국사회의 갱스터는 소수민족 등의 마이너집단에서 재생산된다. 갱스터는 일종의 숙명이고, 신분인 셈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깡패가 재생산되는 곳은 중·고등학교의 교실 안이다. 교실은 동갑내기의 온갖 아이들을 같은 책상에 앉히는 한국사회의 가장 평균적인 공간이다. 여기서 ‘질 나쁜’ 친구와 얼마나 자주, 가깝게 어울리는가에 따라 깡패의 길을 가거나 이들을 두려워하면서도 동경하는 ‘보통사람’으로 남는 것이다. 중요한 건 이들 모두 한 교실에서 원체험을 공유한다는 데 있다.
한국 깡패영화의 계보는 청춘영화나 문예영화만큼이나 오랜 관록을 가지고 있다. <다찌마와리>(류승완 감독의 최근작은 이 작품의 제목을 따온 것이다)를 비롯해 60년대의 초창기 깡패영화들은 유감스럽게도 필름이 소실돼 그 내용이나 스타일을 정확히 알 길 없지만 “박 마담, 우리 뽀뽀나 한번 할까?”라는 유행어를 남긴 허장강, 싸늘한 눈빛으로 담배를 꼬나물던 박노식 등 성격배우들을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스타로 등극시켰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당시 깡패영화의 인기는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70년대 초 유신을 거치면서 깡패 캐릭터는 스크린에서 사라지게 된다. 군사파시즘이 보기에 소시민적 순응성을 거부하고 저항성이나 야성을 자극하는 반영웅 캐릭터는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정서를 내포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깡패영화는 진보성을 담지하고 있는 측면도 없지 않다. 70년대 이후 쇠락한 깡패영화를 부활시킨 건 95년 텔레비전 드라마 <모래시계>였다. 용기와 의리, 그리고 유년기적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깡패 태수(최민수)의 등장은 김영빈 감독의 <비상구는 없다> <테러리스트>,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 <본 투 킬>, 김성수 감독의 <비트> 등 깡패영화의 바람몰이 역할을 했다.
자신의 성장담을 시나리오화한 곽경택 감독
그 이후 멜로영화의 기세에 밀려 한동안 깡패영화는 이제 그 시대가 막을 내렸는가 싶었지만 <친구>를 통해 화려한 부활을 예고한다. 자신이 겪었던 성장담을 직접 시나리오에 옮긴 곽경택 감독은 뮤직비디오 스타일의 감각적인 영상과 논픽션적인 생동감을 등장인물들에게 불어넣는 데 성공했다. 등장인물 모두에게 억센 부산사투리를 연기시키며 노스탤지어를 한층 자극하는 지방적 정서까지 영화에 자연스럽게 입힌 감독의 섬세한 연출은 관객이 잊었던 ‘그’와 만나는 데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을 모두 제거한다.
그러나 여자냄새 나는 멜로영화에 대한 반편향으로 남자냄새 물씬 나는 깡패영화에 쏟아질 환호는 어쩐지 불길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회칼을 그 자리에서 서른번 쑤시는 이 영화를 통해 테스토스테론의 사회화, 미학화 작업이 은근슬쩍 다시 진행될까 두렵고 많은 이들, 특히 젊은 세대에게까지 여전히 ‘깡패’가 노스탤지어나 친근감의 대상일 정도로 우리 사회가 ‘깡패적 요소’가 농후한 사회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둘도 없는 친구였던 준석을 배신하고 상대조직의 행동대장이 된 동수(장동건).
준석(유오성)과 동수(장동건), 상택(서태화)과 중호(정운택). 벌거숭이로 커다란 타이어 튜브 하나에 매달려 물장구를 치던 열세살 소년들은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함께 <플레이보이> 핀업걸의 젖가슴을 더듬고 이소룡의 날렵한 폼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자신들의 미래가 서로 다른 길을 향해 갈라질 수밖에 없다는 걸. 까마귀 교복의 고등학생이 됐을 때 이미 이들은 모두 서로가 ‘가지 않은 길’을 엇갈려 밟고 있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상택은 모범생이었지만 아버지가 폭력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준석은 학교의 ‘통’(짱)으로, 미래도 자존심도 약속해주지 못하는 장의사 아버지를 둔 동수는 준석의 오른팔이 됐다. 하지만 이때 이들은 여고 축제에 가서 노래하는 소녀를 보면 같은 박자로 가슴이 쿵쾅거리는 열여덟살이었다. 쌍소리에 주먹질을 해대는 교사에 대한 분노와 친구를 위해 대책없이 몸을 던지는 동네 패싸움은 이들을 여전히 한동아리로 묶었다. 그러나 스무살, 상택과 중호는 대학생이 됐지만 준석은 방 안에서도 사시나무 떨듯 떠는 마약중독자가 됐고, 동수는 수감중이었다. 함께 촌스런 사진첩을 보며 낄낄거리기엔 이들은 너무 멀리 떨어진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리고 20대 중반이 됐을 때 준석과 동수는 각각 다른 조직의 행동대장이 되어 서로의 심장에 칼을 겨누는 ‘친구’가 된다. 〈Come Back〉, 〈Call Me〉 등 그 시절 일탈의 장소였던 ‘롤라장’(롤러스케이트장)에 울려퍼지는 댄스음악, 얼룩 교련복에 핀컬 파마, 툭하면 머리를 가격하는 흉기로 둔갑했던 커다란 출석부. <친구>는 말 그대로 친하고(親), 오래된(舊) 것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호출해낸다. 우리는 <친구>를 통해서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만나는 것이다. 또한 <친구>는 60년대부터 끊일 듯 끊일 듯 이어지면서도 관객에게 강한 임팩트를 남긴 깡패영화가 왜 오늘날까지 여전히 우리의 친구로 남아 있는지 설명한다. 이 영화에서 상택은 관찰자이자 진술자인 동시에 관객 자신이기도 하다. 서른을 넘긴 남자 관객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교실에서는 언제나 맨 뒤에서 인생 포기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도 참을 수 없는 교사의 행패에 눈을 부라리고, 껄떡대는 양아치를 한 주먹에 날리며, 때로는 힘없는 동급생을 보호해주기도 하는 그 친구를. 이름 석자 대신 깡패라는 명찰을 달고 다니며 우리에게 공포와 함께 한없는 동경의 설렘을 심어놓은 그 친구를. 고등학생이 된 상택과 준석, 동수는 일상을 공유할 수 없을 만큼 멀어졌지만 건달들에게 위협받는 상택 앞에 불현듯 나타난 준석과 동수는 건달들을 ‘반쯤 죽여놓는’ 우정을 발휘한다. 갱스터는 태어나고 깡패는 만들어진다

사진/<비트>에 이어 <친구>에서 유오성은 깡패연기에 하나의 전형을 만들어 놓았다.

사진/<친구>는 녹색톤의 아름다운 화면을 통해 빛바랜 시간 속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