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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기중기, 장애도 들어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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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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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신지체장애인협회 중앙회 이사로 활동 중인 씨름선수 이봉걸

▣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그가 상대를 번쩍 들어올려도 웃음이 터졌다. 대롱대롱 매달린 작은 체구의 이만기(44)가 거구인 그의 다리에 ‘호미걸이’로 발을 살짝 걸어놓고 ‘자, 넘기려면 넘겨보라’며 버티고 있던 탓이다. 한라장사 출신 후배 이기수(40)씨는 “작은 선수한테 지고 나면 비애감 같은 걸 많이 느끼셨다”고 했다.

그가 누군가를 모래판에 쓰러뜨려도 웃음이 나왔다. 마치 큰 나무에 붙은 매미를 툭 털어내는 듯한 모습이었고, 정작 그의 무릎이 서서히 고장나고 있었는데도 팬들은 205cm 장대가 껑충껑충 뛰며 좋아하는 것을 박장대소하며 즐겼다. 이만기·이준희(49)에게 져 멋쩍게 걸어나오면 “키 값을 못한다”면서 쯧쯧 혀를 차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고, “저 키로 들배지기·밭다리 기술을 시원스럽게 하는 거인 장사는 없었다”며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천하장사,인간 기중기!’1987년 3월 부산에서 열린 제12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결승에서 숙적 이만기(현대)를 제압하고 장사 타이틀을 거머쥔 이봉걸(럭키금성)이 이중곤 감독을 끌어안으며 기뻐하고 있다.(사진/ 연합뉴스)


웃음 주던 천하장사. 잔정 많고 술 좋아하는 그는 대뜸 “아, 그분들을 만나면 안타까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정말 눈물이 나올 때가 많아요”라며 우렁찬 목소리를 잠시 가라앉혔다. “정신지체장애 분들이 기분 좋아서 손 들고 만세 부르는 걸 봐도 그렇고,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맡기고 세상 밖으로 나갔는데 마음 편히 이곳저곳 가지 못하는 걸 봐도 그렇고. 하긴 저도 건강할 때는 그런 게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유도 3개월 만에 학교·집 뛰쳐나와

‘인간 기중기’로 불린 이봉걸(49) 장사.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는 2004년부터 맡은 대전지체장애인협회 회장을 거쳐 현재 한국정신지체장애인협회 중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몸이 불편한 이들과 만나게 된 것도 순전히 씨름 때문이다. 씨름이 그를 영예로운 자리에 올려놓은 대가로 무릎을 앗아가면서 비로소 주변을 돌아보게 했다는 것이다.

경북 안동에서 육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키 178cm에 몸무게가 78kg이었다. 운동부가 가만둘 리 없었고, 유도부 감독이 그를 낚아챘다. “몸이 크다 보니 들어가자마자 당시 대학생 국가대표였던 선수의 훈련 파트너가 된 거예요. 스파링 상대가 돼주다가 밑에서 목조르기를 당했는데…. 아,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다 유도한 지 3개월 만에 학교와 집을 뛰쳐나왔죠.”

4년 남짓 거리를 떠돌았다. “제과점 종업원도 하고, 남의 집 머슴살이 같은 것도 하고. 강원도 태백에 가서 석탄도 캐고 그랬지요. 그러다 74년 당시 김택수 대한체육회 회장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때 키가 202cm로 훌쩍 자랐는데, ‘제 키가 이렇고, 학교에서 도망쳐 나와 이렇게 지내고 있는데, 한번 운동을 해보고 싶다’고.”

그가 꾹꾹 눌러 쓴 간청은 경북 체육회로 전달됐고, 이듬해 그의 허리에 샅바가 채워졌다. 친구들이 대학교에 들어가던 시기에 그는 나이 많은 중학교 3학년 편입생이 됐다.

그는 78년 대통령기 씨름대회 장사결정전을 잊지 못할 경기로 기억하고 있다. 67년부터 전국씨름을 천하통일해 이 대회 통산 9번째 우승을 노리던 김성률(작고) 장사를 꺾는 파란을 연출하며 60년대 초 김용주(214cm), 70년대 박범조(204cm)를 잇는 거인 장사의 출현을 알린 것이다. 80년 3개월간 현대 농구단에서 잠시 공을 잡는 이색 경험도 했던 그는 84년부터 천하장사 대회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는 고경철·이준희·홍현욱 등이 나온 86년 제10대 대회 결승전에서 이만기에게 호미걸이로 한 판을 뺏긴 뒤 세 판을 따내 첫 정상에 등극했다. 순박한 표정과 느릿느릿한 말투를 지녔던 그는 축포가 터지자 모래를 뿌리며 성큼성큼 감독 품으로 뛰어가는, 제법 과감한 세리머니를 펼쳤다. 천하장사 2회, 백두장사 4회, 226전 187승. 그러나 82% 승률이 그를 조금씩 갈아먹는 독초가 됐다.

다섯 번의 수술… 장애 6등급 판정

“85년 럭키금성씨름단 겨울훈련에서 무리하다가 오른 무릎을 다친 뒤 총 다섯 번이나 수술대에 올랐죠. 89년 1월 훈련에도 관절이 좋지 않아 하루 쉬려고 했는데, ‘쉬면 어떻게 하냐’고 해서 또 훈련을 받다가 완전히 망가졌고, 그해 7월 수술 이후 더 이상 재활하기 힘들어지더라고요. 두 다리 굵기도 차이가 나고, 씨름은 오른쪽 다리로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지금도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갈 때 뭔가를 붙잡고 조심해서 걸어야 합니다. 관절이 없으니까 자칫 넘어지면 큰일 나니까요.”

강호동·김칠규·황대웅 등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던 즈음, 그는 조용히 샅바를 풀었다. 이후 씨름협회에 힘을 보태면서도 죽염 제조업, 신용카드 결제기를 생산하는 벤처회사, 건강식품회사, 통닭 체인점 같은 여러 사업에 덤벼들었지만 동업자가 돈을 빼돌리는 등 잇단 고배를 마셨다. 장애 6등급 판정을 받은 뒤 그렇게 재기와 실패를 거듭하던 그에게 지체장애인협회가 함께 일해보자고 권했다.

“그동안 내가 보지 않고 몰랐던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싶어 많이 고민했죠.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까 장애인이 편히 갈 수 있는 길이 없어요. 지하철 리프트도 안 되는 곳이 많고, 출입구 턱은 휠체어를 가로막고. 그러다 보니 장애인들이 집에만 있게 돼 정신마저 위축되는 것 아닙니까? 사회 참여의 문턱은 말도 못하고.”

그는 ‘말만 그럴싸한’ 복지 행정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지난해 5·31 지방선거에서 대전광역시 서구 시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다. “뭘 해보려고 해도 조항이 없다며 가로막기에, 누가 권유한 것도 아니고 조그만 복지정책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조례라도 내 손으로 만들어보겠다며 나갔죠. 그런데 당과 당 싸움이 되다 보니까….”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나간 그는 장애인 일자리 만들기,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교육 여건 향상 등을 약속했지만 ‘한나라당 압승’에 밀려 참패를 맛봤다.

침체에 빠진 씨름을 다시 살리고 언젠가 모래판에서 지도자로 서고 싶다는 그는 작지만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일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방에만 있는 장애인들이 밖으로 나와 가고 싶은 곳에 마음껏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어요. 그 출발은 관심입니다. 손도 몸도 이상한데 환하게 웃는 뇌성마비 분들의 웃음을 지켜줘야죠.” 80년대 어려웠던 시절에 웃음 주던 그 ‘인간 기중기’는 또 어떻게 웃음을 퍼올릴까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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