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인 것’이 ‘윤리적인 것’에 도달하는, 이시영의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 신형철 문학평론가
민주화 20년은 망각의 20년이다. 얼마나 많은 죽음들이 다시 죽어갔는가. 국가가 주관하는 기억 사업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업들은 기억의 출발이 아니라 망각의 끝이다. 기억이 공적인 것이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기억의 의무를 면제받게 된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아도 국가가 대신 기억해준다. 국가의 기억 속에서 개별 죽음들의 단독성은 스러지고 만다는 것도 문제다. 거기서 죽음은 집단화되고 계량화되고 마침내 추상화된다. 곤란한 일이다. 모든 죽음은 개별적이고 무한하며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달리 기억해야 한다. 기원전 500년 그리스의 돌연한 건물 붕괴 현장에서 죽은 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복기해냈던 시인 시모니데스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시인 이시영은 2003년부터 매년 한 권씩 세 권의 시집을 연이어 출간했다. <은빛 호각>(2003), <바다호수>(2004), <아르갈의 향기>(2005). 이 겸손한 제목의 시집들 안에는 눈물겨운 기억술의 정화들이 가지런했다. 시모니데스의 재림이라서 반가웠다. 죽은 줄도 몰랐던 사람들, 죽은 줄 알았으나 어느덧 망각된 사람들, 죽음을 앞두고 있으나 결코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기억되고 있었다. 윤리적이어서 좋은 시집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 시집들은 ‘시적인 것’이 발생하는 최초의 순간을 향해 거슬러 가고 있었다. 뜨거운 소재들이 무기교의 기교로 수습되고 있었다. 김수영의 눈으로 김종삼의 마음이 쓰고 있는 시들이었다. 시모니데스가 2년 만에 새 시집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2007·창비)를 출간했다. 이 시집의 제목은 이미 출간된 세 시집을 아우르는 것처럼 보인다. 2년의 시간 동안 시인은 더 넓어졌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한국의 과거는 물론이고 세계의 현재를 향해 더 큰 눈을 뜨고 있다. 시인은 전쟁·환경·빈곤의 문제를 두루 아파하면서 평화·공존·인륜의 메시지를 조용하지만 완강하게 품는다. 두 편을 옮긴다. “32년 만에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씨들은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누웠다. 그러나 그들의 뼈는 결코 웃을 수가 없었다. 누가 그들에게 젊은 육신의 옷을 입혀줄 수 있단 말인가.”(‘젊은 그들’ 전문) 시모니데스의 분노다. 마지막 두 문장 때문에 시가 되었지만, 여덟 명의 이름이 빠짐없이 호명되는 순간이야말로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달라이 라마께서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중국의 한 감옥에서 풀려난 티베트 승려를 친견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심했느냐는 물음에 승려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고 한다. ‘하마터면 저들을 미워할 뻔했습니다 그려!’ 그러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승려의 두 손이 가만히 떨렸다.”(‘친견’ 전문) 시모니데스의 경외다. 내가 울컥했던 것은 승려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 뒤에 어김없이 떨렸던 그의 두 손 때문이다. 이 순간 인간은 인간적이어서 얼마나 숭고한 것인가. 이것은 백 편이 넘는 시 중에 고작 두 편일 뿐이다.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는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시영의 최근 시들은 사태들을 향해 ‘충분히 가까이’ 간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과 끝내 시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한 장의 사진 같다. 이것은 ‘시적인 것’을 발견하는 신선한 기술이면서 시가 ‘윤리적인 것’에 도달하게 만드는 지극한 태도이기도 하다. 시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올바른 시는 드물다. 시가 아직도 공공 영역이라고 믿는 시인은 더더욱 드물다. 드문 시인의 드문 시집 한 권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이 채 안 된다. 그 1시간 동안 독자는 ‘이런 식으로 써도 되는 것인가’ 하는 놀라움과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 시가 아닌가’ 하는 감동을 동시에 맛보면서 어리둥절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1시간을 빼앗아 거기에 이 시집을 놓아두고 싶다. 아니다. 네 권의 시집 모두를 강권한다.

(일러스트레이션 / 권남희)
그러니 달리 기억해야 한다. 기원전 500년 그리스의 돌연한 건물 붕괴 현장에서 죽은 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복기해냈던 시인 시모니데스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시인 이시영은 2003년부터 매년 한 권씩 세 권의 시집을 연이어 출간했다. <은빛 호각>(2003), <바다호수>(2004), <아르갈의 향기>(2005). 이 겸손한 제목의 시집들 안에는 눈물겨운 기억술의 정화들이 가지런했다. 시모니데스의 재림이라서 반가웠다. 죽은 줄도 몰랐던 사람들, 죽은 줄 알았으나 어느덧 망각된 사람들, 죽음을 앞두고 있으나 결코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기억되고 있었다. 윤리적이어서 좋은 시집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 시집들은 ‘시적인 것’이 발생하는 최초의 순간을 향해 거슬러 가고 있었다. 뜨거운 소재들이 무기교의 기교로 수습되고 있었다. 김수영의 눈으로 김종삼의 마음이 쓰고 있는 시들이었다. 시모니데스가 2년 만에 새 시집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2007·창비)를 출간했다. 이 시집의 제목은 이미 출간된 세 시집을 아우르는 것처럼 보인다. 2년의 시간 동안 시인은 더 넓어졌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한국의 과거는 물론이고 세계의 현재를 향해 더 큰 눈을 뜨고 있다. 시인은 전쟁·환경·빈곤의 문제를 두루 아파하면서 평화·공존·인륜의 메시지를 조용하지만 완강하게 품는다. 두 편을 옮긴다. “32년 만에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씨들은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누웠다. 그러나 그들의 뼈는 결코 웃을 수가 없었다. 누가 그들에게 젊은 육신의 옷을 입혀줄 수 있단 말인가.”(‘젊은 그들’ 전문) 시모니데스의 분노다. 마지막 두 문장 때문에 시가 되었지만, 여덟 명의 이름이 빠짐없이 호명되는 순간이야말로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달라이 라마께서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중국의 한 감옥에서 풀려난 티베트 승려를 친견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심했느냐는 물음에 승려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고 한다. ‘하마터면 저들을 미워할 뻔했습니다 그려!’ 그러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승려의 두 손이 가만히 떨렸다.”(‘친견’ 전문) 시모니데스의 경외다. 내가 울컥했던 것은 승려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 뒤에 어김없이 떨렸던 그의 두 손 때문이다. 이 순간 인간은 인간적이어서 얼마나 숭고한 것인가. 이것은 백 편이 넘는 시 중에 고작 두 편일 뿐이다.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는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시영의 최근 시들은 사태들을 향해 ‘충분히 가까이’ 간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과 끝내 시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한 장의 사진 같다. 이것은 ‘시적인 것’을 발견하는 신선한 기술이면서 시가 ‘윤리적인 것’에 도달하게 만드는 지극한 태도이기도 하다. 시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올바른 시는 드물다. 시가 아직도 공공 영역이라고 믿는 시인은 더더욱 드물다. 드문 시인의 드문 시집 한 권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이 채 안 된다. 그 1시간 동안 독자는 ‘이런 식으로 써도 되는 것인가’ 하는 놀라움과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 시가 아닌가’ 하는 감동을 동시에 맛보면서 어리둥절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1시간을 빼앗아 거기에 이 시집을 놓아두고 싶다. 아니다. 네 권의 시집 모두를 강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