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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코리아팀, 세계 축구잔치에 총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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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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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급 대표팀이 한꺼번에 국제대회에 출전한 올 여름, ‘코리아 축구’를 추억하다

▣ 신명철 <스포츠 2.0> 편집위원 smc6404@naver.com

축구잔치가 국내외 마당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은 7월1일 몬트리올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막을 올린 ‘FIFA U-20 World Cup Canada 2007’(2007년 20살 이하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D조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미국과 1-1로 비긴 뒤 브라질에 2-3으로 아깝게 졌다. 북한은 E조 경기에서 파나마와 0-0으로 비긴 데 이어 강호 체코와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남북이 20살 이하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함께 나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은 이 대회를 첫머리로 8월까지 2007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아시안컵)와 17살 이하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그리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 잇따라 출전한다. 100년이 넘는 한국 축구사에서 각급 대표팀이 이렇게 짧은 기간 한꺼번에 국제대회에서 기량을 겨루는 일은 처음이다. 17살 이하 대회는 한국이 개최국으로, 이런 축구잔치가 열린다는 것 자체가 한국 축구의 발전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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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축구는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 23살 이하 프로선수의 출전을 허용했다. 1996년 애틀랜타 대회부터는 24살 이상 선수 3명의 와일드 카드도 인정했다. 1983년 프로축구가 출범한 한국은 1970년대까지 국가대표와 올림픽대표의 구분 없이 월드컵, 올림픽 예선에 모두 국가대표팀이 나섰다. 올림픽에 프로선수들의 출전이 금지되다 보니 1950~70년대 올림픽 축구는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헝가리, 폴란드 등 아마추어 나라들의 독차지였다.

70년대까지 국가대표·올림픽대표 구분 없어

이럴 즈음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오르면서 한국 축구에 비상이 걸렸다. 1967년 1월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가 우수선수들을 반강제적으로 끌어모아 만든 ‘양지’는 1969년 105일에 걸친 장기 유럽원정을 다녀왔다. 목표는 1970년 멕시코월드컵 출전이었다. 팀 이름 양지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 부훈에서 따왔다. 그러나 양지 선수들을 주축으로 한 한국은 일본, 오스트레일리아와 벌인 지역예선 15-A조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2위를 하며 탈락했다. 그리고 한국은 곧이어 1972년 뮌헨올림픽 아시아 동부지역 예선에 나섰다. 1964년 이후 8년 만에 올림픽 본선 출전을 노렸으나 1971년 9월25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말레이시아전에서 0-1로 발목이 잡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예선 이후 주요 국제대회에서 줄줄이 쓴잔을 마시자 오랫동안 참고 참았던 축구팬들이 분노했다. 특히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과 3-3으로 비겼지만 골득실차에서 앞서 멕시코올림픽에 나간 일본이 동메달을 딴 데 대해 축구팬들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전이 끝난 뒤 500여 명의 팬이 본부석으로 몰려가 대한축구협회를 성토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이어 2006년 독일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고 치자. 협회 게시판은 다운됐을 것이고 서울 신문로에 있는 축구회관 앞에서는 연일 집행부 사퇴를 촉구하는 모임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때는 제대로 된 구호도 없이 욕설을 퍼부은 것만으로 끝났지만 시대 상황으로 볼 때 놀라운 일이었다. 시위라는 낱말 자체가 금기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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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대신 출전해 ‘멕시코 4강 신화’

이후에도 한국은 올림픽과 쉽게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는 이스라엘, 1980년 모스크바 대회에는 또다시 말레이시아에 밀렸다. 물론 모스크바 대회는 출전권을 땄어도 출전은 하지 못했다. 1984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등 중동세에 눌려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그 뒤 한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 자동 출전한 뒤 5회 연속 본선에 진출했다. 1971년 9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서울운동장 시위가 본선 출전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오늘날 한국 올림픽대표팀의 밀알이 됐는지도 모른다.

20살 이하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1983년 멕시코 대회 ‘4강 신화’다. ‘신화’에는 꼭 그럴듯한 뒷얘기가 있게 마련이다. 1977년 창설 대회에 나서지 못한 한국은 1979년 제2회 일본 대회에서 1승1무1패 조 3위로 8강 진출에 실패했다. 1981년 제3회 오스트레일리아 대회에서는 조별 리그 1차전에서 이탈리아를 4-1로 꺾으며 돌풍을 일으켰으나 1승2패로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세계대회에 2연속 출전하며 나름대로 가능성을 찾은 한국은 1983년 대회에 출전할 수 없게 됐다.

한국은 1982년 8월 싱가포르에서 벌어진 제23회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동부지역 예선 준결승에서 북한에 3-5로 진 뒤 3·4위전에서 타이를 4-1로 물리치고 3위에 입상했다.

그런데 북한은 11월 뉴델리에서 열린 제9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경기 결과에 불만을 품고 주심을 폭행해 아시아축구연맹(AFC)으로부터 2년 동안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에 따라 한국은 12월 벌어진 제4회 멕시코 대회 아시아지역 예선에 북한을 대신해 중국과 함께 동부지역 대표로 출전해 2승1무로 1위에 올라 본선에 나가게 됐다. ‘멕시코 4강 신화’에는 이런 곡절이 있었다.

1991년 6월 포르투갈 대회에 남북은 당당하게 단일팀 ‘코리아’를 보냈다. 당당한 이유가 있다. 1990년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제27회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은 나란히 결승에 올랐다. 한국이 승부차기 끝에 북한을 4-3으로 이겨 남북이 우승, 준우승을 나눠가졌다. 그리고 남북 단일 ‘코리아’를 이뤄 본선 조별 리그에서 강호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꺾고 8강에 올랐다. 후반 43분 미드필드에서 날린 조인철의 슈팅은 아르헨티나 골대를 향해 한참을 날았다. 그런데 공이 골망을 흔들기도 전에 아나운서의 “골, 골, 골”이라는 소리가 터졌다. 그림보다 소리가 먼저 오는 위성중계의 특성 때문이었다.

남북 ‘철’이들의 ‘코리아’를 떠올리며

‘코리아’에는 ‘철’이 들어가는 이름이 유난히 많았다. 조인철 외에 아일랜드전에서 경기 종료 20초 전 동점골을 넣은 최철, 윤철(이상 북쪽)과 박철, 강철, 한연철(남쪽) 등이 한국 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포르투갈에서 평양으로 직행해 환영행사를 마친 ‘코리아’의 남쪽 선수들은 두 달여에 걸친 평가전과 합숙훈련 그리고 대회 출전 등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판문점 북쪽 지역인 통일각까지 마중 나온 북쪽 선수들과 헤어졌다. 판문점 남쪽 지역으로 내려오는 주장 이태홍을 비롯한 선수들의 눈은 한결같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뒤 16년 만에 남북 선수들은 단일팀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아시아를 대표해 세계 무대에 다시 한 번 ‘코리아’의 축구를 알렸다. 초여름에 펼쳐지는 축구잔치를 보며 떠오른 기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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