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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어느 근대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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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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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감동이 느껴지는 고백,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

▣ 태풍클럽 출판 편집자

이름만 친숙했던 나쓰메 소세키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이십대 후반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때 나는 직업을 바꾸기로 결심한 뒤 한가롭게 빈둥대면서, 사실은 세상에 나를 받아줄 자리가 과연 있을까 마음 한켠으로 무척 불안해하면서, 오후의 어느 조용한 다방에 앉아 소세키의 <그 후>(1906)를 읽었다. 고즈넉한 문장과 날카로운 심리 묘사도 일품이었지만, 소세키가 살았던 20세기 초와 지금의 사람 사는 모습이 그다지 다를 것 없다는 깨달음에 위안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러스트레이션 / 이정현)


주인공인 다이스케는 ‘고등유민’(高等遊民)이다. 소세키 시대의 이 유행어는 한마디로 고등백수라는 의미다. 다행히 아버지가 부유한 실업가이기에 그는 가족에게 용돈을 받아 비교적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다.

소설 초반부에는 당시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매연>이라는 소설에 얽힌 사건이 잠시 언급된다. ‘<매연> 사건’이란 소세키의 제자였던 소설가 모리타 소헤이가 여성운동가이자 사회명사였던 유부녀 히라쓰카 라이초와 ‘지적인 동반자살’, 혹은 정사(情死)를 하려다 미수에 그친 일을 신문 연재소설로 쓴 것이다. 다이스케는 그런 드라마틱한 행위의 원동력이 오직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지 않으며, 그런 일을 단행할 만큼 단순하지 못한 자신이 불행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냉소적이면서도 극히 현대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오자키 고요(尾崎紅葉)가 사랑 때문에 죽고 못사는 신파, ‘이수일과 심순애’의 원형인 <곤지키야샤>(金色夜叉)를 발표해 폭발적인 인기를 끈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절에 말이다.

어느 날, 그에게 형편이 어려워진 대학 동창 히라오카가 찾아온다. 다이스케에게는 히라오카의 아내가 된 미치요를 좋아했지만 ‘의리’ 때문에 호기롭게 그녀를 양보한 과거가 있다. 그는 미치요가 남편과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다시 그녀에게 마음이 끌린다. 무엇에도 놀라지 않고, 무슨 일에도 열정을 보이지 않던 냉담한 다이스케는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가족에게, 사회에게 절연당해 외롭고 힘겨운 길을 걷게 된다.

다이스케가 살았던 메이지 말기는 입신의 욕망과 출세주의가 오늘날 못지않게 치열했던 시대였다. 에도 시대의 봉건 가신들은 메이지 시대의 귀족이 되었고, 러일전쟁으로 큰 부를 쌓아올린 신흥 부르주아들은 혼인을 통해 그들의 명예에 동참하고자 했다. 서민들은 어떻게든 안전한 은행이나 관공서에 취직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계급의 테두리에서 밀려나는 것은 곧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이었다. 금전적 기반을 가족에게 의지하고 있던 다이스케 역시 그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그가 아무 변명 없이 미치요를 선택하자 다이스케의 형은 의절을 선언하며 말한다. “너는 평소부터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인간만큼 위험한 건 없다.”

인간관계에, 금전관계에 누구보다 민감하고 예민했기 때문에 타인의 어떤 견해나 행동에도 흔들리지 않으려 했던 이 일본 근대의 ‘햄릿’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사회 바깥으로 내몰게 한 사랑. 그것은 정사나 운명을 들먹이는 화려한 로망이 아니라, 소세키의 작품 전반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삶의 한 형태이자 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윤리다.

다이스케는 향기 짙은 백합꽃을 사이에 두고 미치요에게 무겁게 사랑을 고백한다. 세상의 기준에 따른 죄가 아니라 오로지, 미치요에게 솔직하게 청혼하지 못했던 자신의 자연스럽지 못한 옛 행동을 참회하며. “세상에 대해서는 죄를 짓더라도 당신 앞에서 참회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겁니다.”

서글픔과 함께 가슴 서늘한 감동이 느껴지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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