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비 오는 날이면 몸이 단다. 몸속에서 일탈의 기운이 올라온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사람과 있고 싶다. 흰 시트가 정갈한 침대방이거나 도톰한 요가 깔린 온돌방이라면 더 좋겠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싼 채 가만히 누워 만지고 싶다. 창밖으로 긋는 비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가만, 이거 ‘불륜 드라마’에 뻔하게 나오는 장면이잖아?
나의 에로스적 욕망과 상상력은 어디까지가 내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주입된 것일까?
이탈리아의 성과학자 빌리 파시니는 자신의 책 <욕망의 힘>에서 “오늘날의 성적 욕망은 성공하려는 욕망,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 새 자동차나 유행하는 옷을 사고 싶어하는 다른 경쟁적 욕망 때문에 약화됐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세상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데, 소비욕이나 물욕처럼 성적 욕망도 점차 외부에서 비롯된다고 한다(아저씨, 우리나라에서는 집 평수 늘리고 싶어하는 욕망을 빼놓으면 안 돼요). 그는 이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사람들이 오직 흥분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스토리가 축소된 포르노 영화처럼 서둘러 성적 행위를 소비하고 있다”고 걱정한다. 아, 무서운 얘기다. 성적 욕망이 상품이며 소비재라니. 성기 모양의 손잡이를 당기고 들어와 빨간색 입술 모양의 의자에 앉아 화면을 통해 ‘그들의 섹스’를 관람하는 것이 ‘미래의 성’이라면, 나는 그냥 과거에 머무르고 싶다.
미국의 ‘휴먼 오운’(Human Own)이라는 단체 회원들은 인류의 조상을 연구하면서 고릴라 세계를 주름잡던 유혹의 7단계를 정리했다. 다음과 같다. 시선(마음에 드는 상대를 쳐다본 뒤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목 근육이 당길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한다) → 눈 맞추기(수줍게 내리깔거나 도도하게 노려보는 게 아니다. 3초에서 5초 정도 강렬하게 쳐다본다) → 눈 깜박거리기(바비 인형의 원조 모델인 셈) → 고개 뒤로 젖히기(목을 보여준다는 건 욕망의 신호이자 허락의 표시이다. “네가 겁나지 않아. 외려 마음에 들어”의 뜻) → 머리 흔들기(머리카락을 풀어헤쳤다 정리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눈길을 끈다) → 화장하기(암컷 고릴라는 신체의 일부를 붉게 만든다. 성적 관심의 즉각적인 신호) → 팔 들기(몸의 깨끗하고 예민한 부분 내보이기. 매력과 신뢰의 표현이다). 유혹은 노동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각적 자극이 이식된 것이건 내재된 것이건,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 가령 나는 옷 못 입는 남자와는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코디네이터의 스타 코스튬을 기대하는 게 아니다(고릴라도 화장을 한다잖아!). 비 오는 날 같이 지내기로 해놓고 샌들에 양말을 신거나 반바지에 양복벨트를 매고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후딱’ 깬다. 중요한 순간에는 다 벗고 있는데 패션감각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위해 최소한의 노동을 하지 않는 상대라면, 그와의 섹스는 노 땡큐다. 보들레르 왈, 욕망에 빠지면 영웅은 겁쟁이가 되고 아이는 용감해진단다. 날씨와 섹스는 확실히 상관관계가 있다. 비 오는 날 나는 나른하다. 비 오는 날 나랑 놀아줄 할 일 없고 옷 잘 입는 남자가 주변에 없는 관계로 ‘오늘도 무사히’지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미국의 ‘휴먼 오운’(Human Own)이라는 단체 회원들은 인류의 조상을 연구하면서 고릴라 세계를 주름잡던 유혹의 7단계를 정리했다. 다음과 같다. 시선(마음에 드는 상대를 쳐다본 뒤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목 근육이 당길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한다) → 눈 맞추기(수줍게 내리깔거나 도도하게 노려보는 게 아니다. 3초에서 5초 정도 강렬하게 쳐다본다) → 눈 깜박거리기(바비 인형의 원조 모델인 셈) → 고개 뒤로 젖히기(목을 보여준다는 건 욕망의 신호이자 허락의 표시이다. “네가 겁나지 않아. 외려 마음에 들어”의 뜻) → 머리 흔들기(머리카락을 풀어헤쳤다 정리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눈길을 끈다) → 화장하기(암컷 고릴라는 신체의 일부를 붉게 만든다. 성적 관심의 즉각적인 신호) → 팔 들기(몸의 깨끗하고 예민한 부분 내보이기. 매력과 신뢰의 표현이다). 유혹은 노동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각적 자극이 이식된 것이건 내재된 것이건,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 가령 나는 옷 못 입는 남자와는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코디네이터의 스타 코스튬을 기대하는 게 아니다(고릴라도 화장을 한다잖아!). 비 오는 날 같이 지내기로 해놓고 샌들에 양말을 신거나 반바지에 양복벨트를 매고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후딱’ 깬다. 중요한 순간에는 다 벗고 있는데 패션감각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위해 최소한의 노동을 하지 않는 상대라면, 그와의 섹스는 노 땡큐다. 보들레르 왈, 욕망에 빠지면 영웅은 겁쟁이가 되고 아이는 용감해진단다. 날씨와 섹스는 확실히 상관관계가 있다. 비 오는 날 나는 나른하다. 비 오는 날 나랑 놀아줄 할 일 없고 옷 잘 입는 남자가 주변에 없는 관계로 ‘오늘도 무사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