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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시작은 아리송했으나 흥행은 괜찮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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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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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걸음 하다가 올 시즌 제2의 전성기 맞은 프로야구

▣ 신명철 <스포츠 2.0> 편집위원 smc6404@naver.com

“너, 전두환의 주구(走狗)지.”

대학을 졸업한 지 3년여 만에 만난 녀석은 예의 직선적인 말투로 자리에 앉자마자 쏘아붙였다. 1982년 10월 말 도쿄의 어느 조그만 호텔 로비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해 3월27일 한국에선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1981년 12월11일 서울 소공동에 있는 롯데호텔에서는 6개 구단 대표가 참석해 서종철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을 초대 총재로 추대하고 한국프로야구위원회 정관을 통과시키는 등 프로야구의 기본 틀을 마련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초창기 단체 이름에 ‘프로’라는 말이 들어 있었으나 얼마 뒤 야구 발전의 주체를 자임하면서 ‘프로’를 빼버렸다.


올 시즌 프로야구는 예상 외의 흥행몰이를 하며 지난해보다 관중이 40%가량 늘어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프로 스포츠에서 최고의 팬 서비스는 다름 아닌 성적임을 새삼 일깨우는 사례다.(사진/ 연합 이정훈)

11년 만에 최소 경기 200만 관중!

서울 연고 구단이자 1981년 봄 프로축구 할렐루야처럼 단일팀으로 프로야구의 싹을 틔워보겠다고 했던 MBC 청룡과 가장 많은 국가대표 출신 선수를 안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운 삼성 라이온즈의 개막전으로 한국 프로야구는 첫걸음을 뗐다. 그해 프로야구는 “홈런으로 시작해 홈런으로 끝났다”는 말에 걸맞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그해 가을 6개 구단과 KBO 실무자 그리고 언론사 프로야구 취재기자들은 ‘신사유람단’을 짜 3진으로 나뉘어 일본 프로야구를 배우러 떠났다. KBO 홍보 담당으로 3진에 끼어 일본에 간 김에 도쿄에서 어렵게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대학 동창을 만났더니 이 녀석이 대뜸 하는 말이 그랬다.

5공 정권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야구의 프로화 작업을 완성했지만 결과물로 보면 1975년 재미동포 홍윤희씨가 추진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겨레21> 658호 69쪽 참조). 박정희 정권이 5·16 쿠데타 이후 밀어붙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4·19 혁명 이후 들어선 민주당 정권, 나아가 1950년대 후반 자유당 정권하의 부흥부(경제기획원·재정경제부 전신)가 입안한 경제개발계획을 베낀 것과 비슷한 사례다.

1970년대 고교야구의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프로야구는 출범 첫해 경기당 평균 관중이 6천 명에 이르는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흥행 부진에서 좀체 헤어나지 못한 프로야구의 경기당 평균 관중은 5천 명 안팎이었다. 1984년에 이르기까지 OB 베어스는 외야에 관중석도 없는 대전구장에서 홈경기를 했고 롯데 자이언츠는 1986년이 돼서야 3만 석 규모의 현대식 구장인 사직구장에서 경기를 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낡고 오래된 구덕구장에서 경기를 치렀다. 구덕구장은 파울라인과 좌우측 내야 관중석 사이의 거리가 유난히 짧은 경기장이어서 늘 부상 위험이 있었다. 그나마 서울 연고 구단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열기 위해 마련한 잠실구장에서 1983년부터 경기를 할 수 있어 지방 구단보다 여건이 나은 편이었다.

국제대회 성적도, 구단 상황도 안 좋지만

이렇다 할 발전의 계기를 잡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던 프로야구가 올 시즌 흥행몰이에 성공하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프로야구는 지난 6월10일 전체 504경기 가운데 41.8%인 211경기를 치르면서 1996년 이후 11년 만에 최소 경기 200만 관중을 기록했다. 현재 추세를 그대로 이어간다고 보면 산술적으로는 480만여 명의 관중을 동원할 수 있다. 이는 1995년 540만 명 이후 최다이다. 구름 관중이 모인 1995년 LG 트윈스는 경기당 평균 관중 2만76명의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야구에 살고 야구에 죽는다’는 구도(球都) 부산의 사직구장은 1992년 1만9201명이 경기당 평균 최다 관중 기록이다.

그렇다면 지난해에 견줘 올 시즌 느닷없이 40%가 늘어난 경기당 평균 9526명의 관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올 시즌이 시작되기 전 예상은 그리 밝지 못했다. 지난해 12월 도하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대만은 물론 사회인야구 선발팀인 일본에도 밀리며 동메달에 그쳐 팬들의 비난이 빗발쳤다. 이는 올 시즌 흥행에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또 1990년대 후반 이후 이어진 우수 선수들의 미국 진출로 프로야구의 경기력이 올해라고 해서 갑자기 좋아질 리도 없었다. 현대 유니콘스 매각 문제는 시즌이 열렸는데도 여전히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미래가 불안한 선수나 코칭스태프가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빗나가게 하는 뜻밖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먼저 현대의 상황부터 보자. 현대는 자신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미국 전지훈련에 나섰다. 김시진 감독은 초보였지만 의연했다. 일단 좋은 성적을 올려야 구단 매각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유리할 것이라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현대는 예상대로 시즌 초반에는 고전했다. 연패가 이어지면서 하위권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사상 유례없는 혼전이 벌어지는 가운데에도 특별한 전력의 보강 없이 6월21일 현재 포스트시즌 진출 커트라인인 4위에 올라 있다. 물론 올 시즌 진행 과정을 보면 언제 하위권으로 미끄러질지 모르겠지만.

국제대회 성적이 국내 리그 관중 동원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도 다시 한 번 입증됐다. 한국 축구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멕시코에 1-3으로 역전패하고 네덜란드에 0-5로 크게 져 대회 도중 사령탑을 바꾸는 홍역을 치렀다. 그래서 1999년 시즌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국가대표팀의 졸전에 축구팬들의 발길이 끊길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이동국, 고종수 등 샛별들의 활약과 안정환이라는 스타의 등장으로 280만여 명의 관중을 끌어모으는 깜짝 흥행을 이뤘다. 한국 야구는 지난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일본을 두 차례나 꺾고 야구 종주국을 자처하는 미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며 3월 한 달 내내 야구팬이 아닌 이들까지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지난해 프로야구 흥행은 그저 그랬다. 메이저리그가 자기들끼리 경기를 하며 챔피언 결정전을 월드시리즈라고 부르고 야구의 올림픽 종목 채택에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이유는 프로스포츠는 리그 자체로 흥미를 끌 수 있다는 매우 단순한 이치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최고의 팬 서비스는 성적

올 시즌 프로야구의 수준이 갑자기 높아졌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1999년 이후 미국에 진출한 선수들의 국내 복귀를 올해 한시적으로 허용했지만 최희섭(기아 타이거즈) 등 복귀 선수들의 활약은 리그의 수준 향상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프로스포츠에서 최고의 팬 서비스는 성적이라는 말이 결코 허튼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프로야구 2007년 시즌이다. 어쨌거나 한국 프로야구는 그 시작은 아리송했으나 이제는 제 힘으로 잘 굴러가고 있으니 세상사는 참 알고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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