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의 은퇴 종용에 코트 떠나는 신진식, 아쉬움 뒤로하고 다시 한 번 ‘백어택’하리
▣ 송호진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dmzsong@hani.co.kr
지난해 ‘우(右) 세진’이 떠나더니, 이제 ‘좌(左) 진식’이 느닷없이 이별을 알렸다. 코트 좌우에서 스파이크를 뿌려대며 한국 배구의 인기를 끝까지 붙잡아왔던 그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구릿빛 피부여서 ‘갈색 폭격기’로 불린 신진식. 그는 지난 6월7일 돌연 은퇴를 발표했다.
“엄마, 진짜 아빠 잘렸어요?”
경기 성남시 한 공원에서 만난 그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원래 하루 10개 정도 피웠는데, 요즘은 한 갑 정도 태우게 되더라고요.” 그는 “집에서 24개월 된 둘째아들 현빈이를 돌보면서 지낸다”고 했다.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1년은 더 뛰고 싶었거든요.” 담뱃재를 털듯 그는 꾹꾹 담았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소속팀 삼성화재는 ‘세대 교체’로 고인 물을 빼겠다며 그에게 은퇴를 종용했다. ‘이쯤에서 나가달라’는 퇴직 권고나 다름없었다. 그는 다른 팀에서라도 선수생활을 하겠다며 이적 동의를 원했다. 삼성화재는 “삼성맨이 다른 데 가면 뭐가 되겠냐”며 놓아주지 않았다. 다른 데 줄 순 없고, 내가 갖기도 싫다? 노장 신진식은 그런 처지가 됐다. (그는 원래 1973년생이다. 눈이 어두운 할머니의 손발이 돼주느라 학교를 9살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시절 배구부 감독이 나이가 많으면 나중에 선수로서 좋지 않을 수 있다고 해 호적에서 2살을 줄였다. 그는 성균관대 93학번이 됐고, 원래 나이는 같지만 한양대 92학번인 김세진을 깍듯이 형이라 부른다. 나중을 대비해 나이를 깎았건만, 선수로서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9살인 큰아들 현수에게 농담으로 ‘아빠 잘렸다’고 하니까, 그날 저녁 ‘엄마, 진짜 아빠 잘렸어요?’라고 묻더군요. 갓난아기부터 배구장에 온 놈인데. 한동안 삐쳤는지 말을 안 하더니 ‘정말 배구 안 하냐’고 또 묻더라고요.” 대학 후배였던 그의 아내도 “이런 법이 어딨냐”며 안타까워했다. “은퇴 이후 진로에 대한 어떤 방안도 없이 그냥 막막하게 내보내려 하니까 처음엔 실망스럽기도 했죠.” 프로농구 이상민(36)이 10년간 몸담았던 전주 KCC에서 떠밀려나갔듯 한국 스포츠는 한 선수를 팀의 전설로 남기는 작업에 둔했다. 신진식도 그게 아쉬운 듯했다. “은퇴식도 내가 결정하라고 하는데…. 큰 회사니까 (명예롭게 떠날 수 있도록) 충분히 만들 수 있을 텐데 말이죠.”
그러나 그는 “모든 걸 내려놓으니 이젠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1년 더 운동할 수도 있지만, 결국 1년 빨리 지도자 공부를 하는 것도 낫다고 결정했죠. 지도자 연수 등 여러 조건을 놓고 삼성화재와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후배들을 위해 은퇴 이후의 조건과 관련한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지만 뜻대로 잘되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새 몸은 ‘종합병동’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구를 시작한 그는 탄력이 좋아 갑자기 높이뛰기 선수로 차출돼 보름을 훈련하고 전라도 완주군에서 2등을 한 경력도 있다. 그러나 전국대회에 나가면 늘 작은 키가 문제였다. “중학교 때는 점프하면 손바닥 반 정도만 간신히 그물 위로 올라갔죠. 그런데 17살 이하 대표팀에 뽑혀 4개월 남짓 진주에서 훈련하면서 웨이트를 바짝 했더니 점프가 올라가더라고요. 그랬더니 어느 순간 공을 위에서 내려찍게 되는 거예요.” 지금도 그는 188cm에 불과하지만, 풍차 돌리듯 팔을 크게 스윙하며 때리는 배구 타법의 이단아로 통했다. “손바닥 전체로 공을 감아서 때리기 때문에 스파이크 소리도 세고 빠르게 날아갔던 것 같아요.”
그는 전위에서 최고의 공격수이면서도 후위로 오면 최상의 수비를 보여줬다. “수비는 희생입니다. 스파이크 하나 걷어내 세터에게 보내면 분위기가 확 살죠. 내가 공격할 때 어디로 때렸나를 고민하며 빈 곳으로 찾아가 준비하는 거죠.” 그런 탓에 그는 ‘종합병동’이라 불렸다. 1996년 오른쪽 발목, 2001년 왼쪽 발목이 고장났고, 2003년 어깨 수술, 2005년 손목 수술을 받았다. “블로킹을 했는데 스파이크에 어깨가 틀어져 인대가 찢어졌죠. 팔을 들지 못할 정도가 됐어요. 1년여를 재활하는데 정말 죽겠더라고요. 손목도 스파이크를 잡아내려고 손을 쭉 뻗었다가 공에 맞아 연골이 찢어졌죠.”
그러면서도 그는 96년 삼성화재에 입단해 겨울리그 9연패의 금자탑을 쌓았다. 최우수선수 4회 수상은 김세진(3회), 장윤창(2회) 등을 넘어서는 역대 최고 기록이다. “2005년에 외국인 선수가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외국 선수들이 없으면 지금도 삼성화재를 꺾을 팀은 없다고 생각해요. 2005~2006 시즌에 현대캐피탈에 져 10연패가 무산된 게 가장 아쉽죠.” 삼성화재의 장기 집권 붕괴는 곧 배구판의 흥미를 돋우는 기회도 됐다.
그는 2006 도하아시아경기대회 때 손가락 부상을 당한 후배를 대신해 대표팀에 들어갔다. 그는 팔꿈치에 붕대를 감고 출전한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우승을 확정짓는 최후의 스파이크를 날렸다. 당시 태극기를 들고 체육관을 도는 후배들의 대열 맨 뒤에서 그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펄쩍펄쩍 뛰었다. “국가대표로서 마지막으로 보여주자고 생각했죠. 지금 이렇게 되고 나니 그때 가기를 잘했네요.”
외국 클럽서 지도자 공부 계획
그는 “10년 뒤에도 기본기 좋고 한 시대를 열심히 뛰었던 선수가 있었구나 하고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영어를 공부한 뒤 외국 클럽에 가서 지도자 공부를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마치 상대 블로킹에 대고 강하게 때려 정면 승부하던 현역 시절처럼 ‘인생의 2세트’를 힘차게 개척하겠노라고 했다.
“백어택이 뒤에서 날아올라 온 힘을 다해 때리는 강타잖아요. 그게 상대 코트에 꽂히면 전율이 오거든요. 이제 코트를 떠나서도 백어택처럼 내 힘을 다 쏟아봐야죠.”
하루 50~100통의 팬레터를 받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신진식은 후배들 사이에서 ‘인자씨’라고 불리기도 했다. 전라도 출신인 그가 “인자~ 2차전도 이겨야죠. 인자~ 후배들을 독려해야죠”라고 말하는 습관 때문이다. 한 팬은 그런 신진식을 향해 이별의 글을 인터넷에 띄웠다. “배구 레전드. 등번호 1번. ‘좌 진식 우 세진’의 신진식과 작별을 고할 때가 오다니. 인자씨, 인자 안녕….”

(사진/ 삼성화재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