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은 ‘최악’이 되는 말의 타락, 박용하가 <견자>에서 경계하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
‘무이자’를 수도 없이 부르짖는 대부업체 광고가 혐오스럽다. 오직 ‘무이자’라는 단어로만 이루어진 그 단순하고 멍청한 노래를 듣는 일도 괴롭고, 활짝 웃고 있는 광고모델들의 부산스러운 몸짓들도 흉하다.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은 말의 타락이라는 현상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무이자도 아니잖은가. 그런데도 무이자라는 말은 주술사의 주문처럼 반복되면서 시청자를 세뇌한다. 어디 광고뿐인가. 정치인들이 덜떨어진 상호 비방의 현장에서 ‘국민’을 운위할 때, 연예인들이 학예회를 벌이는 짝짓기 프로그램에서 감히 ‘사랑’ 운운할 때, 제 본래 뜻을 잃어버린 말들의 황사에 우리는 숨이 막힌다. 박용하의 네 번째 시집 <견자>(見者, 열림원, 2007)에는 유독 말의 타락을 개탄하고 냉소하는 시들이 많다.
예컨대 다음 구절에 시인의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믿음을 걸고 나열하는/ 줄줄 새는 낙원의 말들 앞에서/ 주워 담을 길 없이 떨어지는 가을날의 잎들처럼/ 입은 철들지 않았고 사람들은 물먹었다.”(‘새털구름’에서) 조심하라, ‘낙원의 말들’이 창궐할수록 ‘말의 낙원’은 모욕당한다. 그 말들은 당신을 물 먹일 것이다. 이것은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말의 인플레이션은 일상에서도 엄연하다. “답변기계들처럼/ 답변기계들처럼/ 말끝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시에다 시인은 ‘…최악을 다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을 얹어놓았다. 이 위악적인 재치가 ‘최선’이라는 말에 침을 뱉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우리는 ‘최선’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를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다음 시는 또 어떤가. “거짓말을 끼니처럼 하는 자들도/ 그걸 뻔히 알면서 묵묵히/ 듣고 있는 자들도 다 같이 서러운 자들이다/ (…)/ 골 빈 듯이 하는 빈말 세상에서/ 이쯤 되면 속아주는 것도 사랑이다/ 속아주는 것이 속이는 것이다/ 담에 만나면 술 한 잔 합시다/ 담은 무슨 다음? 그냥 가!”(‘구름이 높아 보이는 까닭’에서) 일상화된 ‘서러움’에서 역설적이게도 ‘사랑’을 발견해내는 이 시선은 어딘가 김수영의 그것을 닮았다. ‘화병’(火病) ‘원수’ ‘성욕’ 같은 시도 그렇다. 일상성의 영역을 직시하고, 그 앞뒷면을 차분히 개관하면서, 습관화된 위선과 허위를 복기한다. 김수영이었다면 “담에 만나면 술 한 잔 합시다” 따위의 말에 과연 온몸이 가렵기도 했을 것이다. “담은 무슨 다음? 그냥 가!” 이러니 말이라는 것은 얼마나 난해한 숙명인가. 그래서 다음 시는 이렇게 비장하다. “뒤는 절벽이고/ 앞은 낭떠러지다// 돌이킬 수 없는 허공에서/ 너는 뛰어내린다/ 너는 그처럼 위험하고/ 너는 그처럼 아슬아슬하다// 돌이킬 수 없는 생처럼/ 한 번 가버리는 생처럼/ 뒤돌아봐도 그만인 사람처럼/ 너는 절대 난간에서 뛰어내린다// 아마도 너의 뿌리는/ 너도 대부분 모를 것이고/ 너의 착지도 너의 얼굴은 영영 모를 것이다”(‘입’ 전문) 뒤는 절벽이고 앞은 낭떠러지인 것이 무엇일까. ‘입’일 것이다. 입 속은 절벽이고, 입 바깥은 낭떠러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거기서 ‘뛰어내리는 너’는 말일 것이다. 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너의 뿌리”), 그 말이 어디에 도달할 것인지(“너의 착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 난해한 숙명 앞에서 속수무책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 중요한 순간이다”(‘심장이 올라와 있다’에서) 눈 비비고 다시 읽게 되는 구절이다. 사람의 눈에 심장이 올라와 있다니! 그럴 때 눈과 눈 사이의 소통은 타락한 말들의 난장 속에서 얼마나 순정할 것인가. “그대와 처음 눈을 맞췄던 날/ 반했던 날/ 눈이 맞았던 날/ 그게 빛으로 하는 성교란 걸/ 알게 된 건 아주 훗날의 일이지요/ 빛이 맞으니 입도 맞추게 되었죠// 처음 동해와 눈을 맞췄던 날/ 야-했던 날/ 하늘 깊이 푸르렀던 날/ 그게 무한과의 성교란 걸/ 알게 된 건 아주 훗날의 일이지요/ 지금처럼 훗날의 일이지요”(‘성교’ 전문) 이 성교는 아름답다. 말의 낙원도 아마 이 어름에 있겠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정현)
예컨대 다음 구절에 시인의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믿음을 걸고 나열하는/ 줄줄 새는 낙원의 말들 앞에서/ 주워 담을 길 없이 떨어지는 가을날의 잎들처럼/ 입은 철들지 않았고 사람들은 물먹었다.”(‘새털구름’에서) 조심하라, ‘낙원의 말들’이 창궐할수록 ‘말의 낙원’은 모욕당한다. 그 말들은 당신을 물 먹일 것이다. 이것은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말의 인플레이션은 일상에서도 엄연하다. “답변기계들처럼/ 답변기계들처럼/ 말끝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시에다 시인은 ‘…최악을 다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을 얹어놓았다. 이 위악적인 재치가 ‘최선’이라는 말에 침을 뱉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우리는 ‘최선’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를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다음 시는 또 어떤가. “거짓말을 끼니처럼 하는 자들도/ 그걸 뻔히 알면서 묵묵히/ 듣고 있는 자들도 다 같이 서러운 자들이다/ (…)/ 골 빈 듯이 하는 빈말 세상에서/ 이쯤 되면 속아주는 것도 사랑이다/ 속아주는 것이 속이는 것이다/ 담에 만나면 술 한 잔 합시다/ 담은 무슨 다음? 그냥 가!”(‘구름이 높아 보이는 까닭’에서) 일상화된 ‘서러움’에서 역설적이게도 ‘사랑’을 발견해내는 이 시선은 어딘가 김수영의 그것을 닮았다. ‘화병’(火病) ‘원수’ ‘성욕’ 같은 시도 그렇다. 일상성의 영역을 직시하고, 그 앞뒷면을 차분히 개관하면서, 습관화된 위선과 허위를 복기한다. 김수영이었다면 “담에 만나면 술 한 잔 합시다” 따위의 말에 과연 온몸이 가렵기도 했을 것이다. “담은 무슨 다음? 그냥 가!” 이러니 말이라는 것은 얼마나 난해한 숙명인가. 그래서 다음 시는 이렇게 비장하다. “뒤는 절벽이고/ 앞은 낭떠러지다// 돌이킬 수 없는 허공에서/ 너는 뛰어내린다/ 너는 그처럼 위험하고/ 너는 그처럼 아슬아슬하다// 돌이킬 수 없는 생처럼/ 한 번 가버리는 생처럼/ 뒤돌아봐도 그만인 사람처럼/ 너는 절대 난간에서 뛰어내린다// 아마도 너의 뿌리는/ 너도 대부분 모를 것이고/ 너의 착지도 너의 얼굴은 영영 모를 것이다”(‘입’ 전문) 뒤는 절벽이고 앞은 낭떠러지인 것이 무엇일까. ‘입’일 것이다. 입 속은 절벽이고, 입 바깥은 낭떠러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거기서 ‘뛰어내리는 너’는 말일 것이다. 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너의 뿌리”), 그 말이 어디에 도달할 것인지(“너의 착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 난해한 숙명 앞에서 속수무책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 중요한 순간이다”(‘심장이 올라와 있다’에서) 눈 비비고 다시 읽게 되는 구절이다. 사람의 눈에 심장이 올라와 있다니! 그럴 때 눈과 눈 사이의 소통은 타락한 말들의 난장 속에서 얼마나 순정할 것인가. “그대와 처음 눈을 맞췄던 날/ 반했던 날/ 눈이 맞았던 날/ 그게 빛으로 하는 성교란 걸/ 알게 된 건 아주 훗날의 일이지요/ 빛이 맞으니 입도 맞추게 되었죠// 처음 동해와 눈을 맞췄던 날/ 야-했던 날/ 하늘 깊이 푸르렀던 날/ 그게 무한과의 성교란 걸/ 알게 된 건 아주 훗날의 일이지요/ 지금처럼 훗날의 일이지요”(‘성교’ 전문) 이 성교는 아름답다. 말의 낙원도 아마 이 어름에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