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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털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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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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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글 김대중

안녕, 털게?
오늘 점심 반찬에 게조림이 나와서 간만에 너를 생각하게 되었어. 정말 오랜만이지? 난 아직도 그 여름날 어스름 해질 녘에 너와 함께했던 숨바꼭질을 생각하면, 왠지 신비롭고 몽롱한 기분이야.

내가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지…. 그때 부모님은 애 둘 키우기가 벅차셨는지, 우리 형제를 전남 구례군 문척면 월정리 외갓집에 수개월씩 번갈아 맡기셨더랬어.


할아버지, 할머니가 밭일을 나가고 나면 혼자 남아 시커멓게 파리떼가 앉은 아침밥을 맛나게 해치우고 나만의 작은 여행을 떠나곤 했지. 여름날 시골은 정말 놀 게 많았다. 온통 신기한 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거든. 개구리, 맹꽁이, 두꺼비, 미꾸라지, 지네, 땅강아지, 새끼뱀, 거미, 메기, 피라미, 말벌, 땡끼벌….
자연을 쫓아다니다 다시 내일을 기약하며 어느새 마룻바닥에 널브러져 잠이 들었지.

그러던 어느 날, 그 익숙하게 놀던 외갓집 옆 도랑에서 너를 마주치고 만 거야.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에 회색빛 털이 수북하고 눈을 껌벅거리던 바로 너, 털게 말이야~

‘오~, 새롭다!’ 마치 외계에서 온 생물처럼 묘하게 생긴 너를 보고 난 한순간에 반하고 말았지. ‘그래, 오늘은 너와 놀아주마’하고 다시 너를 찾았을 땐 넌 벌써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난 뒤였어. 그렇게 너와 나의 숨바꼭질은 오후 내내 계속됐고, 그 작은 도랑을 수없이 왕복했건만 난 결국 술래를 잡지 못했지.

오후가 지나고 허탈한 기분에 내가 널 본 게 진짜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 순간 아름다운 석양이 온 세상을 다른 빛깔로 바꾸면서 허탈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공허함으로 변했지.

그 기묘한 기분은 이후에도 가끔 너를 떠올리게 하고, 다시 그 어린 날의 기억들을 불러온다…. 이젠 뱀껍질이 널브러진 시골길도 검은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한옥 외갓집도 양옥으로 바뀌어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 되어버렸지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곳의 풍경은 여전해. 그리고 그 풍경의 한 부분은 그날 네가 만들어준 것이지.

고맙다 털게야. 넌 ‘내 인생의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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