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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남쪽 전시장에서 근원이 서걱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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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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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거장 근원 김용준의 40주기 기념전에서 만난 쓸쓸함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단칸방 같은 10여 평짜리 전시장. 방 안에 40년 전 북녘 땅에서 숨진 월북 거장의 그림과 저술, 책표지 삽화 등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 주인공은 근원 김용준(1904~67). 고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수필 ‘두꺼비 연적’의 지은이이자 그 글을 실은 <근원수필>로 수필문학의 기념비를 세운 문필가, 조선색을 강조했던 문인화가, 국내 처음 대중미술사 개론서를 쓴 미술사가다. 이 전방위 지식인의 40주기 추모 전시는 온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1940년대 산수문인화 7점과 그의 손때 묻은 표지 삽화로 치장한 시집, 잡지 20여 권, 발굴사진 등이 옹색하고 휑한 공간 속에 내걸리고 놓였다. 관객은 거의 없다. 들머리 진열창에 40년대 여성잡지에 실린 수필 ‘선부자화상’(선부자화상)에 같이 인쇄된 친필 자화상이 홀아비처럼 초췌하고 서걱서걱한 이미지를 내뿜고 있다.


파주 출판도시 열화당 안 로터스 갤러리에 전시된 근원의 1930~40년대 책 표지 삽화들. 근원은 우아한 품격과 모던한 구도가 특징인 삽화 디자인의 달인이기도 했다.

월북자=빨갱이, 그의 작품=삐라?

근원의 40주기 기념전(6월30일까지, 031-955-7000~5) 풍경은 경기도 파주 출판도시 도서출판 열화당 사옥의 로터스 갤러리에 펼쳐져 있다. 전시를 준비한 이기웅 열화당 대표는 “너무 힘들었다”고 털어놓는다. “자료나 작품을 구하려 해도 최근까지 일부 유족들은 역정내며 피했다”고 한다. “‘월북자=빨갱이’라는 시선이 무서워 고인이 남긴 저술·그림 따위를 삐라처럼 여긴 것 같아요. 더욱 아쉬운 건 기념사업에 도통 무성의한 남한 학계와 국공립 미술관들입니다.”

남한에 수십 점 남아 있는 그림들조차 온전히 못 걸었지만, 그래도 전시장의 얼굴은 그림이다. 양화를 그리다 30년대 말 전통그림 쪽으로 돌아선 근원의 40년대 산수, 꽃 그림들. 산수, 괴석과 비스듬히 걸친 꽃줄기가 조화를 이룬 미공개작 <화훼>는 40년대 해인사 주지를 직접 찾아가 그려준 수작. 친구 화가 김환기에게 물려준 성북동 수향산방의 그림은 꺽다리 새주인 김환기, 훨씬 작은 수화(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의 자태를 담았다. 작가의 시름이 올올이 숨은 듯한 괴석 수선화와 산속 집 난간을 부여잡은 선비와 나룻배 사공을 그린 산수도에 눈맛이 시원하다. 꽃가지가 앞표지부터 옆면을 끼고 뒷면까지 이어진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1948·을유문화사) 표지와 옛 금석문을 표지 글씨와 대칭되게 배치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1948년 종로서원), 이태준 단편집 <달밤> <돌다리> 등의 표지는 처음 발굴해 선보이는 것. 지금도 모던한 근원의 책표지 장정은 우리 책 디자인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한창 물 올랐던 글·그림을 전쟁이…”

전시와 함께 2002년 나온 5권짜리 전집에 실리지 않았던 미공개 수필 9편과 사진 등의 관련 자료를 발굴한 보유편(기존 저술을 보완하는 저술) <근원전집 이후의 근원>도 나왔다. ‘소루유아정’ ‘반야초당 스케치’ 등의 수필과 제자인 한국화가 서세옥씨의 회고글을 실었다. 보유편의 주옥같은 수필글들은 해방 전후 근원이 성북동 노시산방, 경기도 양주 고든골, 서울 경운동, 의정부 반야초당 등으로 거처를 옮겨갔으며, 전통회화로 돌아선 시점이 1939년이란 사실을 알려주었다. 한국전쟁 당시 월북에 대한 제자 서씨의 증언도 새롭다. 해방 뒤 서울 미대 창설을 주도했던 그는 국립대안 설치에 반대해 등교를 거부한 학생의 제적을 막으려 했으나, 빨갱이로 몰며 전원 제적을 요구했던 당시 학장 장발이 격분한 끝에 그에게 주먹질을 해 사표를 썼으며 끝내 월북의 배경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이기웅 대표는 “근원이 조금만 남한에서 버텨주었다면 대업을 이루었을 것”이라며 “한창 글과 그림 솜씨에 물이 올랐던 그를 전쟁이 송두리째 망가뜨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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