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구대성·양준혁·전준호·이종범 등 프로야구 노장들의 눈부신 활약
▣ 신명철 <스포츠 2.0> 편집위원
‘노장은 아름답다’ 이건 빈말이 아니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옛말은 틀리는 법이 없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오랫동안 침체기를 겪고 있는 국내 프로야구는 올 시즌 흥행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프로야구가 회생의 기미를 보이는 데에는 노장들의 분발이 적지 않게 힘이 되고 있다. 프로야구 8개 구단의 35살 이상 선수는 줄잡아 25명에 이른다. 최고령 완봉승과 완투승 등 나이와 관련한 투수 부문 기록을 끊임없이 바꾸고 있는 한화 이글스 송진우는 마흔이 넘은 나이지만 그의 나이가 그리 많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야구가 프로화된 이후 나이 든 선수가 많아지고 선수 생명이 길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1989년, 송진우 입단·이형종 출생
송진우는 1989년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면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최근 프로에 들어오고 있는 새내기들이 태어날 무렵이다. 지난 4월 벌어진 제41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눈물을 뿌리며 공을 던져 스포츠팬들을 찡하게 하고 최근 LG 트윈스와 입단 계약을 마무리한 서울고 이형종은 1989년생이다.
사실 송진우는 프로 입문이 1년 늦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문이다. 서울올림픽에서 야구는 정식 종목이 아니었다. 1912년 스톡홀름, 1936년 베를린, 1956년 멜버른, 1964년 도쿄 그리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등에서 그랬던 것처럼 야구는 시범종목이었다. 그러나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 정식 종목으로 예정돼 있었고 개최국이라는 사실 때문에 대한야구협회는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때처럼 일부 우수 선수의 프로 진출을 유보하고 대표팀을 꾸렸다. 금메달을 목표로 했지만 3위 결정전에서 푸에르토리코에 0-7로 완패해 메달을 따는데 실패했다. 송진우는 그때 조계현, 김기범 등과 함께 1988년 한 해 동안 아마추어팀에서 뛰었다. ‘세일통상’. 야구에 관심이 많은 팬도 기억에서 가물가물할 이 팀이 송진우가 6개월여 몸담은 구단이다.
프로 생활 19년째를 맞는 송진우는 올 시즌 출발이 늦었다. 팔꿈치 통증 때문이다. 그는 5월18일 대전구장에서 벌어진 삼성 라이온즈와의 2군 경기에 등판해 1군 복귀 준비를 마쳤다. 한화는 류현진이라는 빛나는 프로 2년째 투수를 보유하고 있지만 송진우를 비롯해 구대성(38), 정민철, 문동환(이상 35) 등 베테랑 투수들도 여럿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한화는 5월21일 현재 3.38의 수준급 팀방어률로 리그 3위에 올라 있다. 최하위인 LG보다 0.8점 가까이 앞선 기록이다.
특히 구대성의 투구 내용은 놀랍다. 4월6일 SK 와이번스와 치른 개막전에 나선 뒤 무릎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간 구대성은 5월17일 1군에 올라온 뒤 바로 다음날 롯데 자이언츠전에 등판해 구원승을 올렸고 그 다음날에는 세이브를 기록했다. 두 경기 연속 완벽한 마무리였다. 뛰어난 제구력과 완급 조절 그리고 수준급 변화구 등 어디 한 군데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투구 내용을 자랑했다. 와인드업을 할 때 타자에게 등을 보이는 특유의 투구 동작도 여전했다. 노모 히데오와 비슷한 구대성의 투구 동작은 그가 프로 관계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1989년을 전후해 논란거리가 됐다. 몸통을 정상 수준 이상으로 비트는데다 내딛는 발인 오른발이 축족인 왼발을 가로질렀기 때문이다. 그해 9월 서울에서 벌어진 제15회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합숙훈련을 하던 대학선수 중심의 국가대표팀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OB 베어스 2군 구장에서 OB와 연습경기를 가졌다. 그때 마운드에 오른 구대성을 보고 거의 모든 프로 관계자들이 구대성의 ‘이상한 투구 동작’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일부 관계자는 구대성의 선수생활이 그리 길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18년이 지난 오늘에도 구대성은 그때와 똑같은 투구 동작으로 여전히 최고 수준의 마무리 실력을 뽐내고 있다. 농구에 이른바 ‘막슛’이 있듯이 “폼에는 정답이 없고 자기 몸에만 맞으면 된다”는 스포츠계 속설이 구대성의 예에서 다시 한 번 입증되고 있다.
‘운동’이 ‘직업’되니 생명 길어져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 양준혁과 현대 유니콘스 전준호(이상 38) 그리고 기아 타이거즈 이종범과 두산 베어스 안경현(이상 37)은 매일 출전해야 하는 야수지만 후배들에게 뒤지지 않는 체력으로 제몫을 다하고 있다.
양준혁의 올 시즌 활약은 일반적인 예상을 넘어선다. 5월21일 현재 홈런 12개로 김태균(한화·11개), 크루즈(한화)와 이대호(롯데·이상 9개), 김동주(두산 베어스·8개) 등 힘이 넘치는 젊은 타자들을 따돌리고 선두를 달리고 있다. 양준혁은 롯데 1군 투수코치인 윤학길 등과 마찬가지로 대학을 졸업한 뒤 군복무를 마치고 프로로 진출한 몇 안 되는 경우에 속한다. 양준혁은 영남대 시절에 이어 국군체육부대에서 뛸 때 특유의 ‘만세타법’을 완성했다. 프로에 입문하면서 관계자들에게 이상적인 타격 자세가 아니라는 지적을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치켜올리는 듯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 올 시즌에는 5월21일 현재 타율 2할7푼4리(117타수 32안타)로 다소 처져 있지만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타격 솜씨를 자랑한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만하다. 양준혁은 1993년 데뷔 뒤 2001년까지 9시즌 연속 3할대 타율을 올렸다. 그의 나이 33살인 2002년 이후에도 세 차례나 3할대 타율을 기록했다. 이쯤 되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야구선수들의 선수 생명이 이렇게 길어졌을까. 운동을 직업으로 하는 프로화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게 틀림없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 김우열, 윤동균(이상 OB)의 나이는 각각 34, 33살이었다. 그때 그 나이면 이미 은퇴해야 했다. 그러나 프로야구 원년 대표적인 두 노장인 이들은 프로야구가 시작되면서 선수생활을 연장했다. 윤동균은 1982년 타격 2위(0.342)와 타점 9위(47개)를 기록했다. 김우열은 홈런 공동 4위(13개)와 타격 8위(0.310)를 차지했다. 이듬해에도 두 노장의 활약은 이어졌다. 김우열과 윤동균은 각각 타점 7위(56개)와 8위(54개)를 마크했다. 프로야구가 아니었으면 은행 창구에 앉아 있거나 일반직 근무로 돌았을 두 선수가 그라운드를 맘껏 누빈 것이다.
프로화 이전에 야구선수들의 선수 생명이 얼마나 짧았는지는 몇 가지 예에서 바로 알 수 있다. 한국이 세계 규모 야구대회에서 처음 우승을 차지한 1977년 슈퍼월드컵을 이끈 김응룡 감독(수원 구단 사장)의 나이는 36살이었다. 요즘 이 나이면 선수로 한창이다. 김응룡은 20대 후반부터 한일은행 선수와 감독을 겸했다. 한일은행 시절 김응룡의 제자 강병철이 1983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맡았을 때 그의 나이 37살이었다. 1985년 청보 핀토스 사령탑에 앉은 허구연(문화방송 해설위원)의 나이는 34살이었다. 경남고-고려대를 나온 허구연은 촉망받는 내야수였다가 한일은행 시절 다리를 크게 다쳐 일찍 선수생활을 접은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그 무렵 30살은 선수생활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다. 그 나이를 넘기면 업무에서 비선수 출신 동료들을 따라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종범의 빠른 발은 여전히 팀의 보물
이제는 운동이 직업인 세상이다. 자기 관리를 잘하고 꾸준히 실력을 유지하면 얼마든지 선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그리고 단순히 선수생활을 오래 하는 게 아니라 노련하면서도 수준 높은 경기력으로 팬들을 즐겁게 할 수 있다.
이종범은 이제 예전과 같은 파워는 없지만 여전히 빠른 발과 뛰어난 수비로 기아 전력에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 지난 5월17일 수원구장에서 열린 현대전에서는 승패를 결정짓는 시즌 1호 2점 홈런을 터뜨려 팬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아니다. 노병은 사라지지도 않는다.

한화 이글스 송진우 앞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지난해 프로야구 첫 개인 통산 200승 고지에 오른 그의 모습.(사진/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