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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80년생 안티고네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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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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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울해서 섬뜩한 어른이 된 아이, 박연준의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 신형철 문학평론가

1980년생들은 열여덟에 IMF를 겪었다. 그 세대들에게 IMF는 곧 가족의 붕괴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직장을 잃었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으며 나와 동생은 졸지에 가난에 적응해야 했다. 열여덟이면 아이인가 어른인가. 아이였기 때문에 갑자기 어른이 되는 법을 힘껏 배워야 했고, 이미 어른이었기 때문에 힘들어도 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기를 강요받는 아이들은 너무 우울해서 섬뜩한 어른이 되거나 너무 씩씩해서 보기에 마음 짠한 어른이 된다. 후자에 가까운 것이 80년생 소설가 김애란이라면, 전자에 가까운 것이 80년생 시인 박연준이다. 그녀의 첫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창비, 2007)을 읽었다. 그녀가 전하는 슬픈 가족 이야기를 IMF 세대의 내면 풍경으로 읽는 것은 나의 월권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권남희)


어미가 보이질 않는다. “엄마는 빨간 핸드백을 남기고 떠났어요.”(‘일곱살, 달밤’) 어미는 자식들을 두고 집을 나간 것인가. 그래서 딸은 자신의 탄생을 냉정하게 부인하거나 그로테스크하게 왜곡함으로써 어미를 저주한다. “엄마, 더러운 엄마, 나를 낳지 마”(‘나의 탄생’) “엄마의 문란한 질을 뚫고 내가 태어나고 있어요.”(‘나의 탄생2’) 아비는 어디서 뭘 하는가. “아빠의 기저귀를 갈아줘야”(‘일곱살’) 했다. 병들어 누운 아비를 어린 딸이 보살폈던 것인가. 그 아버지는 그녀에게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었을까. “살려주세요, 루돌프 히틀러, 아빠?”(‘꽃을 사육하는 아버지’) ‘아돌프 히틀러’를 ‘루돌프 히틀러’로 바꿔치기했다. 사슴처럼 나약하고 무기력한 아버지(루돌프)였기에 역설적이게도 그 아비는 내 삶을 지배하는 파쇼(히틀러)가 되었다.

그래서 딸은 아비의 아이를 낳는 환상을, 아비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을 불쑥불쑥 노래하곤 한다. 왜 아비의 아이를 낳는가. 부재하는 어미의 자리를 감당해야 했다. 딸과 아내의 자리에서 그녀가 겪은 혼란이 시의 몸을 입은 것이다. 왜 아비를 죽이려 하는가. 제 삶이 아비의 병든 육신에 저당 잡혀 있었다. 그녀가 져야 했을 그 십자가를 시의 힘으로 버텨낸 것이다. 프로이트가 만난 히스테리 여성들이 그러했듯, 아비에 대한 증오와 아비에 대한 애착은 그녀에게도 한 몸이다. 이 지겨운 증오, 이 지겨운 사랑. “아버지, 운 나쁜 나의 애인”(‘봄의 장송곡’)이라는 구절이 그래서 절묘하다. 운이 나쁜 건 그녀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하질 않는가. 이 애증의 수사학이 아프다. 아비 부정에 일로매진했던 선배들과 그녀의 차이가 이 언저리에 있을 것이다. 그녀가 스물다섯에 쓴 시들이다.

“이미 죽은 당신이 자꾸 죽을까봐 겁내는/ 나는, 이마에 못이 박힌 스물다섯/ 마치 지겹게 사정 안 하고 버티는/ 대머리 밑에 깔린 갈보처럼/ 동공 없이 뜬 눈으로 박제된,/ 스물다섯”(‘스물다섯’에서)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 쳐요/ (…)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갈지도”(‘얼음을 주세요’에서)

스물다섯의 삶을 “지겹게 사정 안 하고 버티는/ 대머리 밑에 깔린 갈보”의 그것에 비유했다. 이 독하고 날카로운 비유는 젊은 날의 최승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는 그 독함 이면에 숨어 있는 순한 눈물 때문에, 그 눈물을 닦아내는 상상력 때문에 더 매력적이다.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에서 눈물처럼 무심하게 흐르는 리듬, 저 자신을 케이크에 꽂아 태워 없애는 저 아픈 상상력에 나는 기꺼이 내기를 걸겠다.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는 눈 먼 아비의 손을 잡고 사막을 떠돌았지만, 이 시인은 “눈먼 아버지는 눈이 먼 채로/ 혼자 걸어야 해요”(‘안티고네의 잠’)라고 아프도록 당차게 적었구나. 이 80년생 안티고네에게 평화 있기를. 그대의 아버지는 곧 우리의 삶, 그대의 십자가는 1997년 이후 우리 모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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