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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오늘도 표범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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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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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을 넘기고도 여전히 링에 오르는 ‘김일의 제자’ 프로레슬러 이왕표 선수

▣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 dmzsong@hani.co.kr

이왕표(51). 그는 ‘날으는 표범’으로 불렸다. 링 코너에서 360도 돌려차기(드래곤스페셜), 허공에서 날리는 이단옆차기(파워킥)는 순식간에 목표물을 무너뜨리는 표범의 야성을 닮았다. 190cm·120kg의 거구가 종잇장처럼 가볍게 솟아올라 발을 쭉 뻗으면 상대는 매트가 꺼질 듯한 ‘쿵’ 소리를 내며 나자빠졌다. 그 기술엔 여건부의 ‘알밤까기’, 고 김일 선생의 ‘박치기’와는 또 다른 역동성과 화려함이 담겨 있었다. “그때 승리를 알리는 ‘땡땡땡∼’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도 모르게 손을 하늘로 올리게 되죠. 아, 그 짜릿한 기분을 아십니까?”

‘표범’의 짜릿한 비상. 지난해 9월9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WWA 세계프로레슬링대회에서 이왕표가 캐나다의 킹맨 선수를 상대로 공격을 펼치고 있다.(사진/ 연합 안정원 기자)


1975년 조그마한 신문광고가 19살 청춘을 뒤흔들었다. ‘김일 도장 1기생 모집’. “라디오와 동네 TV로 만났던 선생님은 제 영웅이셨죠. 프로레슬링을 하고 싶었는데 나에게도 기회가 왔구나 생각했어요.” 당시 그는 태권도 6단이었다. 앉았다 일어서기 200번, 팔굽혀펴기 50개씩 두 번, 목을 뒤로 젖혀 매트에 대고 몸을 들어올려 30초 버티기 등의 테스트가 이어졌다. “100명이 넘게 왔는데, 제가 기준 체중에 1kg 모자랐어요. 근데 선생님이 ‘네 눈이 살아 있어 마음에 든다’며 뽑아주셨죠.”

‘김일 1기’ 8명 뽑혀 4명 도망가고

서울 정동 문화체육관 2층 도장에서 합숙훈련이 시작됐다. “8명이 뽑혀 4명이 도망갔는데, 남은 4명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죠. 앉았다 일어서기를 쉬지 않고 1천 개씩 매일 했죠. 선배 한 분당 10분씩 연속해서 15~20명의 선배들과 3시간가량 스파링을 해드려야 했어요. 말이 스파링이지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바동거리다 빠져나오는 게 일이었죠.”

그는 소 눈을 먹은 일화도 떠올렸다. “식당에 갔더니 소머리가 있었는데 선배들이 소 눈을 먹으면 힘이 세진다는 거예요. 농담인 줄 모르고. 그땐 정말 힘이 세지고 싶어 소 눈을 날로 먹기도 했죠.” 그는 2년여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 게 ‘김일의 제자’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테스트하러 가서 얼굴을 뵌 것만도 영광이었는데 그분의 제자가 됐잖아요. 여기서 무너지면 인생의 낙오자가 된다고 여겼죠. 죽어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는 국회의원이 된 일본의 오니타와의 첫 경기에서 진 뒤 20회 연속 패배자로 살았다. 그는 21전22기 끝에 오사카에서 일본 선수를 상대로 고대하던 첫 승을 거뒀다. “김일 선생님은 경기에 대한 칭찬에는 인색했죠. 잘했어도 ‘자식, 그게 시합이냐?’고 혼내셨죠. 근데 첫 승을 거둔 날, 오시더니 ‘수고했다’고 하시는 거예요. 네 글자뿐인 그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다니….”

“링에 서면 호랑이보다 더 무섭게 느껴진 분” “헤드록에 걸리면 이가 다 부러질 정도였다”는 ‘박치기왕’에 대한 그의 또 다른 추억이다. “79년에 경기 도중 다리가 부러져 들것에 실려나가 병원에서 깁스를 하고 왔어요. 선생님이 보시더니 ‘운동선수가 운동으로 풀어야지 뭐하는 짓이냐. 빨리 풀라’고 하셔서 그 자리에서 다 뜯어버리고 말았죠.”

그는 그 ‘박치기왕’을 영원한 스승으로 모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청와대 실력자가 김일 선생님을 불러 차에 태워 한강에 가더니 이곳에 다리(제3한강교)가 곧 생기는데 저 너머 땅을 사라고 했대요. 지금의 압구정이죠. 선생님이 돈을 모아보니 5만 평 정도 살 돈이 되더랍니다. 근데 그즈음 나라가 가뭄에 들었죠. 국민들에게 양수기를 사주라며 미련 없이 그 돈을 국가에 다 바쳤던 분입니다.”

‘천식’ 이겨낸 독기로 여전히 링 위에

이왕표도 1982년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일본 선수를 상대로 한 통쾌한 승리가 생방송된 직후였다.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을 실감했죠. 다음 인천 경기에 갔는데 수백 명의 사람들이 버스로 몰리더니 바로 제 이름 ‘이왕표’를 외치는 거예요.”

그는 1984년 마산에서 열린 3인조 태그 경기를 아름답고도 슬픈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스승 김일, 김일의 동생 김광식과 같이 뛴 마지막 경기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톱 선수라는 하마구치, 이노우에, 아시아하라와 맞붙었는데 2-1로 이겼죠. 그게 선생님이 건강한 모습으로 링에 오른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죠.”

그 뒤 그는 레슬링 입문 10년 만인 1985년 오리엔탈 태그 챔피언, 1990년 극동챔피언, 1993년 GWF세계챔피언, 2003년 WWA세계챔피언을 차례로 휩쓸었다. 오십을 넘긴 나이에 여전히 현역인 그는 지난 5월13일 35살 마이크 휴(캐나다)와 겨뤄 헤비급 타이틀을 방어했다. 고 김일 선생 추모경기를 한 15일 스승의 날엔 특유의 ‘파워킥’으로 두 외국 선수를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나이를 밝힌 적이 없는 그는 “난 스물아홉”이라며 껄껄 웃었다. 합기도 8단, 격기도 9단인 그는 매일 아침 6시부터 6시간씩 운동한다. 신체 나이는 아직 ‘청춘’이라는 얘기다.

그런 그가 숨쉬기 힘든 ‘천식’ 중증을 이겨낸 사실에선 ‘박치기왕’의 제자다운 독기가 느껴진다. 2000년 당시 그의 천식 증상를 발견한 의사는 “오랫동안 천식을 참은 채 레슬링을 해온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그는 꾸준한 관리로 보통 사람의 40%였던 폐활량을 120%까지 끌어올렸다.

고개 숙인 중년에 힘이 될 수 있다면

선문대 무도학과 겸임교수인 그는 이왕표 스포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한국 프로레슬링의 마지막 스타이자, 현재 남은 유일한 대스타이기도 하다. 턱수염까지 희끗해진 그는 왜 또 거친 링에 오르는 걸까? 그는 1992년 160kg 선수가 3단 로프에서 자신의 몸을 덥쳐 갈비뼈 3개가 부러진 적도 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딱 3개월 전에 저를 불러 자신의 초상권 등을 모두 넘겨주시더군요. 가실 날이 가까워졌다는 걸 선생님 스스로 느끼셨나 봐요. 1994년 휠체어를 타고 다시 저희 앞에 나타나셨을 때, 정말 참담했습니다. 일본에서 그렇게 지내시는 줄 알았더라면…. ‘이 관장에게 모든 걸 맡기네. 부탁하네’ 하셨죠. 박치기를 하면 머리가 울리고 귀에서 종소리가 들린다고 하셨어요. 박치기가 싫으면서도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또 박치기를 하신 분 아닙니까? 저 또한 그래야지요. 요즘 고개 숙인 40~50대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에게 하면 된다는 걸 링에서 보여주고 싶어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제 마음에 살아계신 선생님이 그랬듯,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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