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하계 아시아 대회 여는 인천, 세계 속의 브랜드로 우뚝 설까
▣ 신명철 <스포츠 2.0> 편집위원
1970년 12월 제6회 하계 아시아경기대회가 타이 방콕에서 열렸다. 한국은 당시 최고 인기 종목이었던 축구와 농구가 대회 출전 사상 첫 우승을 동시에 이룬데다, 수영 자유형 남자 400m와 1500m에서 조오련이 2관왕이 돼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요즘으로 치면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과 박태환(18·경기고)의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자유형 남자 400m 금메달이 하루이틀 사이에 일어난 것 이상의 분위기였다. 이 대회에서는 또 백옥자가 포환던지기와 원반던지기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는 등 1966년 대회에 이어 2연속 종합 우승을 하는 값진 성과를 이뤘다.
1970년의 기쁨과 슬픔
좋은 성적표를 받은 축구와 농구 선수단이 술 대결을 벌여 농구가 완승한 일은 이후 오랫동안 스포츠계에 화제가 됐다. 축구는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셔도 될 만했다. 한국은 1967년 9월 도쿄에서 벌어진 1968년 멕시코올림픽 축구 아시아 지역 A조 예선에서 일본에 골득실차에서 뒤져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 일본은 본선에서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동메달을 차지했다. 한국은 이 대회 준결승에서 멕시코올림픽 득점왕에 오른 가마모토와 뛰어난 날개공격수 스기야마 등 올림픽 동메달의 주역이 그대로 나온 일본을 연장 접전 끝에 2-1로 물리쳤다.
조오련은 4년 뒤 테헤란 대회에서 다시 2관왕이 돼 ‘아시아의 물개’가 됐다. 축구는 이 대회에서 옛 버마와 공동 우승한 데 이어 1978년 북한과 다시 한 번 공동 우승한 뒤, 1986년 서울 대회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2-0으로 꺾고 마침내 단독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한국 스포츠로서는 잊지 못할 기분 좋은 일이 줄을 이은 대회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대회이기도 하다.
애초 제6회 하계 아시아경기대회는 서울에서 열기로 돼 있었다. 당시 제3공화국 정권은 나라의 경제력을 고려하지 않고 대회를 무리하게 유치했다. 그러나 막상 대회를 열려고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회 주경기장으로 쓰려고 했던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 축구장)의 경우 400m 트랙을 갖춘 보조경기장이 있어야 하는 기본적인 시설마저 돼 있지 않았다. 도저히 대회를 치를 사정이 아니었다. 결국 대회 개최권을 반환하며 국제적인 망신을 샀다. 전 대회 개최지 방콕이 중동 여러 나라의 재정 지원을 받아 다시 한 번 대회를 열었다. 이 일은 1960년대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되지 않는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한국의 1950~70년대 스포츠계 상황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다. 시간을 갖고 착실히 대회를 준비했으면 안방에서 신나는 잔치를 벌일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로부터 16년 뒤 한국은 서울에서 하계 아시아경기대회를 열었다. 1970년대 후반 세계사격선수권대회와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가 서울에서 열렸지만 국제 규모의 종합경기대회가 한국에서는 열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때까지 서울에서 국제대회가 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방에서 국제대회를 볼 수 있는 기회는 한정돼 있었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모국 방문 친선경기나 일본·필리핀 선수들과 벌이는 프로복싱 경기 등이 고작이었다. 그것마저도 부산·대구 등 극히 일부 도시였을 뿐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른 분야에 못지않게 스포츠도 서울 쏠림 현상이 심각했다.
인천이 오는 2014년 하계 아시아경기대회를 연다. 1951년 창설 대회와 1982년 대회 개최지인 뉴델리를 제치고 얻은 결과이기에 축하의 박수를 보낼 만하다. 2002년 부산에 이어 지방 도시가 개최하는 두 번째 하계 아시아경기대회다. 1997년 전북(무주·전주)이 동계 유니버시아드대회, 1999년 강원도(용평·강릉·춘천)가 동계 아시아경기대회, 2003년 대구가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를 치렀으니 이제 지방 도시에서 대규모 국제대회를 여는 게 자연스런 일이 됐다. ‘퍼주기 논란’은 대회 유치 과정에서 나온 일이고, 이제 인천은 2010년 광저우 대회를 비롯해 앞에 벌어진 어느 대회보다 알찬 대회를 열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인천 하계 아시아경기대회를 기점으로 스포츠에서도 ‘탈서울’과 함께 본격적인 지방화 시대를 열게 된다. 국제 규모의 대회를 여는 지방 도시들은 이제부터 ‘한국의 ○○시’가 아니라 그냥 ‘○○시’로 세계에 이름을 알려야 한다. 인천은 이번 대회 유치로 도시의 인상을 새롭게 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1970년대까지 인천 하면 떠오르는 것은 ‘경인공업지대’였다. 구로동을 비롯한 서울의 영등포 지역과 이어지는 공장지대에서 뿜어져나오는 검은 연기가 인천의 상징이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말이 좋아 공업도시이지 인천은 공해에 찌든 회색 도시의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 울산·포항 등과 함께 한국 공업을 이끌어온 고마운 곳이지만 생활 환경은 도시의 발전과 반비례했다.
한국 근대 스포츠의 발상지
치열한 이름 싸움을 거쳐 2001년 문을 연 인천국제공항은 2014년 하계 아시아경기대회를 인천이 유치하는 데 눈에 보이지 않는 공을 세웠다. 선수촌과 경기장 등 대회 시설 접근성이 이만큼 좋은 공항도 그리 많지 않다. 2008년 올림픽이 열리는 베이징의 관문인 수더우 국제공항 이상의 접근성을 보장한다. 인천국제공항은 변모하는 인천의 상징물이면서 40억 아시아인의 축제를 알리는 첨병이다. 아시아경기대회에는 아시아인만 참가하는 게 아니다. 국제단체 임원 등 종목별 전문가들은 물론 세계적인 체육용품사 관계자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이 대회 기간 인천을 찾게 된다. 인천은 그들에게 인천의 독자적 브랜드를 알리게 된다.
인천은 한국 근대 스포츠의 발상지다. 1882년 제물포항에 입항한 영국의 플라잉 피시호는 이 땅에 축구라는 종목의 씨를 뿌리고 갔다. 야구는 1905년 선교사인 필립 질레트가 서울에서 처음 소개한 것이 정설로 돼 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1899년 인천에 살고 있던 후지야마 후지사와라는 일본인 학생이 쓴 일기에 ‘야구놀이라는 서양 공치기’를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어 인천은 야구의 최초 도입지일 가능성도 있다. 인천은 또 야구(SK 와이번스), 축구(인천 유나이티드), 농구(인천 전자랜드), 배구(인천 대한항공 점보스) 등 4대 프로 스포츠 구단을 모두 안고 있는 유일한 도시다. 한국 스포츠의 대표적인 도시 인천이 2014년 하계 아시아경기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4월17일 쿠웨이트에서 열린 제26차 아시아올림픽평회의(OCA) 총회에서 2014년 하계 아시아경기대회 개최지로 인천이 결정됐다. 이날 저녁 인천시청 앞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하행사가 열려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있다.(사진/ 한겨레 박종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