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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허무명랑 주부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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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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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탕탕 튀는 주부생활 리얼리즘, 성미정의 <상상 한 상자>

▣ 신형철 문학평론가

한국 시에 불만 있는 당신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후천성 위트 결핍증이라고 하셨던가요? 선비 아니면 투사, 댄디 아니면 아티스트. 그래서 다들 너무 비장하고 너무 슬프고 너무 우아하다 운운. 인정! 그렇다면 정현종의 ‘헤게모니’나 황인숙의 ‘시장에서’ 같은 시는 어떠신지? 발랄한 시들이지요. 그러나 여전히 뻣뻣한 당신. 그렇다면 특단의 조치. 성미정 시인의 시집들을 권합니다. 잘 모르신다고요? 말하자면 일상다반사를 어여쁘고 슬풋한 위트로 포섭해 시로 끌어올리는 시인. 마침 최근 세 번째 시집이 나왔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권남희)


첫 번째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1997)이 나왔을 때 그녀의 시에는 ‘엽기’나 ‘잔혹’ 따위의 말이 따라붙었습니다. ‘문단의 래퍼’라는 칭호도 얻었지요. 적절한 명명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감상과 내숭이 없었을 뿐이지요. 이를테면, 성미정씨, 파랑새는 어디 있나요? “좋은 방법을 알려주지(…)우선 새를 잡아와(…) 그리고 남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새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때리란 말이야 시퍼렇게 멍들 때까지(…) 맞아서 파랗든 원래 파랗든 파랑새라는 게 중요한 거야”(‘동화-파랑새’에서) 이런게 진짜 위트지요. 그녀의 시는 당의정이 아닙니다.

두 번째 시집 <사랑은 야채 같은 것>(2003)에 오면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됩니다. 그녀는 파랑새를 찾았을까요?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 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길 원했다/ 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 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고기를 올렸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사랑은 야채 같은 것’에서)

여기엔 미묘한 반어의 기운이 있습니다. 내가 맞춰가야지, 버려야지, 희생해야지. 그러나 과연? 같은 시집의 다른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보이지 않는 진짜 사랑보다는 쿠키를 나누며 싹트는 사랑이 더 깊어질 수 있다 스누피는 그걸 아는 놈이다 그래서 개집에 사는 게 아니라 개집 지붕 꼭대기에 누워서 빈둥거리는 거다.”(‘스누피란 놈’에서) 그리고 이런 덧붙임. “나의 남편 배용태는 가끔씩 내 머리 꼭대기에 누워 있는 스누피 같다.” 그러니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은 차라리 사랑의 긍정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가족의 힘? 이 긍정은 어쩐지 삶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녀는 파랑새를 찾은 것도 같습니다.

세 번째 시집 <상상 한 상자>(랜덤하우스 펴냄, 2006)에서 그녀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오고 나서/ 참 이상한 일이 생겼다// 슬픈 건 더 슬퍼지고/ 기쁜 건 더 기뻐지고// 맛있는 건 더 맛있어지고”(‘그 아이가 오고 나서’에서) 축, 배재경 군 탄생! 이제 그녀의 사랑론도 달라집니다. 재경이는 갈치 마니아입니다. 밥상에 갈치가 올라오면 엄마와 아빠는 젓가락질 한 번 못하지요. 그래도 “재경이 입속으로 하얗고 폭신한/ 갈치 살이 쏙쏙 들어가는 걸 보면/ 어찌 그리 예쁘고 대견한지” 엄마 아빠 배가 다 부릅니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사랑은 갈치 같은 것.”

그러나 살짝 걱정입니다. 그녀의 기발한 상상력이 다소 온건해졌어요. 시인도 아는 듯합니다. 시에 관한 시들이 부쩍 는 걸 보면. “여보 저는 시인입니다”와 “여보 저는 시인입니까” 사이에서 그녀는 좀 쓸쓸해 보입니다.(‘시인실격’에서) 그러나 이 자의식이 그녀의 시들에 “허무명랑”한 매력을 얹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맙시다. 시인들은 더러 아저씨가 아닌 척, 아줌마가 아닌 척합니다. 그녀는 다릅니다. ‘주부생활 리얼리즘’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소 온건해졌지만 여전히 탕탕 튑니다. 그래서 그녀를 응원합니다. 그리고 당신께 권합니다. (사족. 처음에 저는 시집 제목을 ‘싱싱한 상자’로 잘못 읽었습니다. 그렇게 읽어도 매우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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