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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조국이 버린 이야기꾼, 세풀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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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3-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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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적 의미가 숨겨진 칠레 망명작가의 픽션, <연애소설 읽는 노인>과 <감상적 킬러의 고백>

사진/라틴아메리카 문단 '포스트 붐' 세대 대표주자인 루이스 세풀베다.
스페인 속담에 “조국에서는 그 누구도 예언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진정한 위인은 자신의 조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하지만, 해외에서는 제대로 평가받는다는 의미의 이 속담은 칠레의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는 1989년 <연애소설 읽는 노인>으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고, 이후 <세상 끝으로의 항해> <귀향>(원제: 투우사의 이름), <파타고니아 익스프레스>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 <감상적 킬러의 고백> 등의 작품을 출판한다. 그러나 그는 칠레를 제외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유럽에서는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아직도 자신의 조국에서는 이렇다 할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책표지에 가짜 경력을 적다

흔히 루이스 세풀베다는 아르헨티나의 마누엘 푸익과 멤포 지아르디넬리, 칠레의 이사벨 아옌데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와 더불어 ‘포스트 붐’의 대표작가로 평가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카를로스 푸엔테스와 같은 20세기 최고의 작가들을 자랑하는 라틴아메리카 현대소설은 ‘붐’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불리게 된 것은 폭탄이 폭발하듯이 세계문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세계문학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붐 작가들은 리얼리즘에 반발하여 소설 형식의 실험성과 세계성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엘리트주의로 나아간다. 반면에 포스트 붐 작가들은 대중문학과 대중영화의 구조를 사용해 대중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억압적 현실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던 자신들의 상황을 대중문화와 결합시킨다. 이런 이유로 ‘포스트 붐’ 작가들은 자기들을 이미지의 아들이며 이야기꾼이라고 말한다.


최근에 ‘열린책들’에서 출판된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과 <귀향> <감상적 킬러의 고백>은 포스트 붐 작가들이 지닌 망명작가의 경험과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1949년 칠레의 오바예에서 태어난 세풀베다는 1970년대 말에 피노체트 군사 독재에 반대하다가 몇달간 수감된 뒤, 대부분의 포스트 붐 작가들처럼 망명길에 오른다. 이후 남미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1980년부터는 독일에 정착하고, 지금은 스페인에 살면서 아직도 망명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대중문화의 아들이며 동시에 이야기꾼답게, 그의 작품은 쉽고 빨리 읽히며 단순하다. 그리고 짧은 분량 속에 무수한 에피소드를 삽입하면서 독자들의 흥미를 자아내어,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면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세풀베다가 ‘픽션’을 만들어내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은 그의 가짜 경력에서도 증명된다. 특히 1989년에 출판된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책표지에 적힌 그의 화려한 경력은 “최근에 볼 수 없었던 가장 멋진 광시곡”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라틴아메리카의 유명 문학상을 휩쓴 작가로 등장한다. 1969년에는 쿠바의 ‘아메리카의 집’ 문학상을, 1976년에는 시부문에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상을, 그리고 1978년에서 로물로 가예고스상을 수상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1969년의 ‘아메리카의 집’ 문학상은 칠레의 작가인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지붕 위의 나신(裸身)>에 수여되었고, 1978년의 로물로 가예고스상은 멕시코의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1976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상의 시부문에는 수상자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좌익독자를 겨냥한다”

사진/세풀베다가 원작을 쓰고 '시인'역 성우를 맡은 애니메이션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Lucky & Jorba, 1998)의 한 장면.
이 일화는 우스갯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세풀베다 작품의 본질이 바로 ‘픽션’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픽션 속에는 정치·사회적 의미가 숨겨져 있다. 세풀베다는 유럽의 여러 일간지에 독재정권과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글은 ‘좌익’ 독자를 겨냥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주로 반독재, 반신자유주의, 정치 투쟁적 관점에서 논해진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입장을 소설 속에서 노골적으로 주장하거나 세계관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흥미 위주의 이야기로 가득 찬 그의 작품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지를 찾는 것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이미 1993년 국내에 소개되었던 적이 있는 작품이며, 김혜순은 이 소설을 바탕으로 ‘네겹의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기’란 시를 쓰기도 했다. 이 소설은 개발이란 미명 아래 원시림 아마존을 파괴하는 백인 노다지꾼들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현지 읍장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리는 환경 소설이다. 주인공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아마존의 수아르족과 함께 밀림에서 생활한다. 그는 갈수록 황폐해지는 아마존을 무기력하게 지켜본다. 그리고 치과의사가 가져다주는 연애소설을 읽으면서 무료한 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중 백인 밀렵꾼의 시체가 떠내려오고, 그는 새끼들과 수놈을 잃은 암살쾡이가 보복으로 인간 사냥에 나선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이 예감은 현실이 되고 이내 인간과 동물의 피할 수 없는 싸움으로 발전한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제1세계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만들어낸 ‘지구촌’이란 말이 얼마나 위선적이며 허상인지를 보여준다. 지구촌이란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에는 미개한 소수 부족의 삶과는 상관없이 단지 이윤만을 목적으로 하는 모더니즘 세계의 산물이며, 인류의 행복이란 구실로 자행되는 백인들의 개발이 결국 그들을 파멸의 길로 몰고 갈 것임을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있다.

한편 <귀향>과 <감상적 킬러의 고백>은 포스트 붐 작가들이 가장 즐겨 구사하는 하드보일드 소설의 기법을 사용한다. <귀향>은 나치 독일에서 사라진 63개의 금화를 찾아 그것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음모와 그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가는 소설이다. 이 작품 속에서 작가는 갑작스런 사회변화에 따라 실직한 전직 첩보 장교와 전직 라틴아메리카 게릴라의 현실과 고민을 생생히 다룬다.

특히 투우사의 이름과 동명이며 산디니스타 전직 게릴라였던 후안 벨몬테와 기억 상실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의 애인 베로니카를 통해, 세풀베다는 고문이나 폭력과 같은 가장 비인간적인 학대로 엄청난 후유증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상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피노체트 독재 체제가 끝났지만, 지금 칠레의 민주체제란 과거 체제 옹호자들의 또다른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주장한다. 정치인들은 ‘국가화합’이란 미명 아래, 지난 과거를 무조건 잊고 독재자들을 용서하자고 외치고, 민중은 그런 망각에 동조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진정한 화합이란 과거를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되돌아보면서, 생존자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모두가 피해자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에 빠지는 킬러와 신자유주의

<감상적 킬러의 고백>은 냉혈한이어야만 하는 킬러가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킬러는 애인을 만나기로 한 날 새로운 일거리를 맡는다. 그런데 그는 전문 킬러답지 않게 표적의 개인 신상에 호기심을 느끼고, 아무런 이유없이 소식조차 없는 자신의 여자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결국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실업자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서 킬러는 유럽과 미국이 현재 라틴아메리카에 강요하고 있는 경제 모델을 암시한다. 킬러는 돈에 의해 움직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이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는지는 개의치 않는다. 이런 점에서 킬러는 신자유주의 경제라고 불리는 모델의 경험으로 읽힐 수 있다.

세풀베다의 소설은 ‘픽션’의 재미를 잃지 않은 채, 현대적 주제를 다루면서 오늘날의 역사를 쓰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또한 한 가지 문학 형식의 포로가 되지 않고, 모험소설이나 하드보일드 소설, 혹은 우화와 같은 장르들을 패러디하면서 미래의 사회적·정치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여기서 패러디란 변화를 의미한다. 즉 패러디적 글쓰기는 변화와 해방을 바라는 망명작가의 창조적 행위이다. 언젠가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운 민주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하는 포스트 붐 작가들이 대중 장르의 패러디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송병선/ 문학평론가 avions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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