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읽고 사랑에 빠졌으나 이제는 결별한 전향자의 고백
▣ 태풍클럽 출판사 편집자
이것은 한 전향자의 고백이다. 그랬다. 90년대 초반에 나는 하루키를 읽었고,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2000년대가 됐을 때쯤, 나는 그의 소설들을 전부 다락에 올렸다. 딱히 별다른 의식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나는 소설이 거대담론만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며 또한 세계화에 맞설 민족문학의 가치를 믿지도 않는다. 그저 여러 직장을 전전하고 거듭 연애에 실패한 뒤, 나는 감각이나 감수성에 기대기보다 경우를 따지게 되었고, 그래서 더 이상 그의 소설들이 유효하지 않게 된 것뿐이다. 아직도 친정집 다락에는 누렇게 변한 그의 소설 십여 권이 뒹굴고 있을 터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상실의 시대> <양을 찾는 모험> <일각수의 꿈>…. 그렇게 나는 등쪽으로 이십대의 문을 닫았다.
아주 가끔은 그의 책을 다시 기웃거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에 체류하면서 더욱 코즈모폴리턴해진 그의 작품들은 예전만큼 편치가 않았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보면서는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캐릭터가 제일인 이유가 뭔데, 하고 중얼거렸고, <태엽 감는 새>는 중일전쟁 묘사를 읽다가 그냥 내려놓고 말았다. 그의 장편 <댄스댄스댄스>에는 젊은 시절, 감각적인 문장으로 혜성같이 등장했다가 나이가 들어 옛날의 영광을 뜯어먹고 사는 중년의 소설가 캐릭터가 나온다. 아마도 <태양의 계절>로 등단했다가 지금은 도쿄도지사가 된 이시하라 신타로가 모델이 아닐까 싶은데, 하루키를 서가에서 방출시킬 때, 나는 그 인물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 세대의 유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이는 하루키보다는 무라카미 류 쪽에 더 잘 들어맞는 것 같다. 각종 잡문을 책으로 펴내는 경지를 넘어 <반도에서 나가라>를 쓰는 데까지 이른 류 말이다(그 책을 한·일 합작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은 간만의 코미디였다). 그래, 하루키는 그것보다는 더 영리했다. 그리고 더 오래가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하루키를 베꼈다는 혐의를 받으며 데뷔한 작가들이 어느덧 중견이 되고, 그들이 하루키를 베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그의 소설은 아직도, 심지어 더 많이 읽힌다. 신기한 것은 내가, 그리고 감히 일반론을 도입하자면 내 세대 중 일부가 그의 세계를 졸업한 뒤로도, 신입생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차이라면, 하루키를 찾아 읽는다 함이 대학의 90년대 초반 학번에겐 어느 수준에서나마 스놉(재산과 지위로 거만을 떠는 속물)한 행위일 수 있었으나, 0자 붙는 학번들에게는 전혀 유행의 첨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 정도다. 그 정도로 더 대중적이다. 또한 글로벌하다. 2004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갔을 때, 각 나라의 제일 큰 문학 출판사 부스는 온통 그의 사진으로 도배가 돼 있었다. 지난해에 한국을 방문했던 시마다 마사히코는 “만일 하루키가 노벨상을 받는다면 그것은 민족문학의 승리가 아닌 세계화의 승리일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하루키를 안 읽는 쪽으로 돌아선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온통 일본 문학 천지가 돼버린 대형 서점이나 지금 한참 하루키에 빠져 있는 아랫세대를 보며 개탄할 생각도 전혀 없다(게다가 은밀히 고백하자면, 어떤 종류든 간에 전향이란 그 이전과 이후 어느 쪽이 나은가라는 가치판단에 앞서는 일종의 죄책감을 남기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지난해쯤 신문에서 고전에 대해 무식하고 하루키만 읽는 젊은 세대를 일갈한 모 교수의 글을 보면서 그 비난의 화살이 전혀 과녁 근처에도 닿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지금의 나는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하루키 소설의 좋고 나쁨을 떠나, 그와 같은 개인주의 문화들이 어떻게 해서 나의 90년대를 찾아왔으며, 그리고 그중에서도 왜 유독 하루키만이 더욱 세련되고 살벌한 2000년대에 살아남았는가 하는 것이. 그때와 지금이 또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 그리고 그 원인이 아직도 한국 문학의 ‘경쟁력’에만 국한될 일일까 하는 것이.

일러스트레이션/ 이정현
아주 가끔은 그의 책을 다시 기웃거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에 체류하면서 더욱 코즈모폴리턴해진 그의 작품들은 예전만큼 편치가 않았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보면서는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캐릭터가 제일인 이유가 뭔데, 하고 중얼거렸고, <태엽 감는 새>는 중일전쟁 묘사를 읽다가 그냥 내려놓고 말았다. 그의 장편 <댄스댄스댄스>에는 젊은 시절, 감각적인 문장으로 혜성같이 등장했다가 나이가 들어 옛날의 영광을 뜯어먹고 사는 중년의 소설가 캐릭터가 나온다. 아마도 <태양의 계절>로 등단했다가 지금은 도쿄도지사가 된 이시하라 신타로가 모델이 아닐까 싶은데, 하루키를 서가에서 방출시킬 때, 나는 그 인물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 세대의 유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이는 하루키보다는 무라카미 류 쪽에 더 잘 들어맞는 것 같다. 각종 잡문을 책으로 펴내는 경지를 넘어 <반도에서 나가라>를 쓰는 데까지 이른 류 말이다(그 책을 한·일 합작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은 간만의 코미디였다). 그래, 하루키는 그것보다는 더 영리했다. 그리고 더 오래가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하루키를 베꼈다는 혐의를 받으며 데뷔한 작가들이 어느덧 중견이 되고, 그들이 하루키를 베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그의 소설은 아직도, 심지어 더 많이 읽힌다. 신기한 것은 내가, 그리고 감히 일반론을 도입하자면 내 세대 중 일부가 그의 세계를 졸업한 뒤로도, 신입생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차이라면, 하루키를 찾아 읽는다 함이 대학의 90년대 초반 학번에겐 어느 수준에서나마 스놉(재산과 지위로 거만을 떠는 속물)한 행위일 수 있었으나, 0자 붙는 학번들에게는 전혀 유행의 첨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 정도다. 그 정도로 더 대중적이다. 또한 글로벌하다. 2004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갔을 때, 각 나라의 제일 큰 문학 출판사 부스는 온통 그의 사진으로 도배가 돼 있었다. 지난해에 한국을 방문했던 시마다 마사히코는 “만일 하루키가 노벨상을 받는다면 그것은 민족문학의 승리가 아닌 세계화의 승리일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하루키를 안 읽는 쪽으로 돌아선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온통 일본 문학 천지가 돼버린 대형 서점이나 지금 한참 하루키에 빠져 있는 아랫세대를 보며 개탄할 생각도 전혀 없다(게다가 은밀히 고백하자면, 어떤 종류든 간에 전향이란 그 이전과 이후 어느 쪽이 나은가라는 가치판단에 앞서는 일종의 죄책감을 남기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지난해쯤 신문에서 고전에 대해 무식하고 하루키만 읽는 젊은 세대를 일갈한 모 교수의 글을 보면서 그 비난의 화살이 전혀 과녁 근처에도 닿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지금의 나는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하루키 소설의 좋고 나쁨을 떠나, 그와 같은 개인주의 문화들이 어떻게 해서 나의 90년대를 찾아왔으며, 그리고 그중에서도 왜 유독 하루키만이 더욱 세련되고 살벌한 2000년대에 살아남았는가 하는 것이. 그때와 지금이 또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 그리고 그 원인이 아직도 한국 문학의 ‘경쟁력’에만 국한될 일일까 하는 것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