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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언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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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26 00:00 수정 : 2010-02-0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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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보장자산은?” “그것도 키스라고…” <웃찾사> 속 ‘언니’의 발견

▣ 안인용 기자nico@hani.co.kr

동생 남편과 바람난 친구의 머리채를 휘감아쥐는 <내 남자의 여자> 은수 언니, 동생을 위해 첫사랑도 깨끗이 잊어주는 <소문난 칠공주> 설칠이 언니, 동생의 우유부단한 미지왕 남자친구를 향해 “너 재수없어!”를 날려주는 <내 이름은 김삼순> 이영 언니…. 이 언니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은수 언니나 설칠이 언니, 이영 언니가 내 언니라면 조금 더 든든한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언니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드라마를 보면 언니라는 존재는 때론 엄마 같고, 종종 친구 같고, 가끔은 애인 같기도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드라마 속 언니들을 능가하는 언니를 발견하고 말았다. 사단이 벌어지고 수습해주는 언니가 아니라 애초에 사단이 벌어지기 전에 경고장을 날려주는 언니, 냉엄한 현실을 알려주고 바로바로 행동지침을 내려주는 ‘닳고 닳은’ 언니, <웃찾사> ‘귀여워’의 현정 언니(김현정)다.

“방자, 너 지금 보니 선이 곱다야”

김현정과 이경분이 자매로 활약하는 <웃찾사> ‘귀여워’. 김현정이 연기하는 언니는 인생의 거품이 아닌 진짜 맛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 단비 같은 조언을 해주고, 순수한 어린이의 모습과 닳고 닳은 여인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즐거운 웃음도 준다.


유치원생 경분이(이경분)의 하나밖에 없는 언니인 현정 언니는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어린이와 다르지 않다. 분홍색 꼬까옷만큼 귀엽고 밝고 천진난만하다. 그러나 경분이와 단둘이 있을 때 언니의 진가는 비로소 드러난다. 현정 언니가 경분이에게 읽어주는 동화에는 언니가 6~7년 그 긴 세월 동안 깨우친 현실적인 사랑의 교훈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잠에 빠진 공주는 왕자의 키스를 받고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현정 언니에 따르면 공주는 이런 대사를 날린다. “야, 그것도 키스라고 하냐, 꺼져. 다음 남자 들어오라 그래.” 동화 속 공주는 키스해준 왕자와 사랑에 빠지지 않느냐고? “야, 한낱 아이스크림 따위도 골라 처먹는 재미가 있는 판인데 그 잘나신 공주께서 남자 골라 만나지 않겠냐. 우리도 이럴 때가 아냐. 나중에 남자 골라 만나려면 지금부터라도 개같이 일을 해서 벌어놔야 해.” 이렇게 어떤 동화든 현정 언니의 해석을 거치면 드라마, 그것도 아침 드라마나 금요 드라마가 된다.

<춘향전>에서 춘향이는 이도령을 떠나보내고 시름에 잠긴다. 현정 언니에 따르면 춘향이는 방자에게 기대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방자야, 나 너무 힘들어. 방자, 너 지금 보니까 선이 굉장히 곱다야.” 춘향이는 이도령을 기다려야 하지 않느냐고? 여기서 또 한 말씀! “지고지순은 무슨 쌍팔년도 얘기를 하고 자빠졌어. 언제 올지도 모르는 놈을 주구장창 미쳤다고 기다릴 거냐. 자리 싹 비웠을 때 이놈 저놈 찔러보고 입질이 온다 싶으면 바로 낚아주는 거야.” <인어공주>에서 물에 빠진 왕자를 구한 인어공주는 뭍으로 나와서 왕자를 깨우며 이렇게 묻는다. “왕자님 장남이세요? 왕 죽으면 왕위 계승하는 거 맞아요? 보장자산은 얼마나?” 왕자와 인어공주의 운명 같은 사랑은 어디 갔느냐고? “야, 운명 같은 사랑 따위 지나가는 개나 줘버려. 결혼은 현실이다. 언제까지 남자 얼굴 뜯어먹고 살 건데. 남자 얼굴 딱 1년 가는 거야. 사랑은 2년 가고, 그 다음엔 돈이다.”

유치원생 현정 언니는 사랑에만 통달한 게 아니다. 인생에도 통달했다. 경분이와 달리기를 시작한 현정 언니는 자꾸 출발선에서 반칙을 하고, 경분이는 “언니, 왜 출발선을 안 지켜!”라면서 핀잔을 준다. 이어지는 언니의 한마디, “야, 사람마다 타고난 인생의 출발선이 다 다른 거야. 부모 잘 만나서 돈 많고 얼굴 이쁘고 그런 애들은 출발선이 저 앞쪽에 있단 말이야. 슬금슬금 기어나가야 출발선이 좁혀진단 말이지.” 현정 언니는 경분이와 덧셈 뺄셈 놀이를 하다가 계속 답이 틀리자 또 이렇게 일갈한다. “손가락이 열 개밖에 없잖냐. 신이 이걸 열 개 만들었다는 것은, 그 이상의 숫자는 몰라도 밥 빌어먹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뜻이야.”

업그레이드된 김현정의 연기력

‘귀여워’는 현정·경분 자매의 연기 하나로 처음부터 끝까지 가는 코너다. ‘퀸카 만들기 대작전’에서 보여준 김현정의 연기력은 ‘귀여워’에서 업그레이드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어린이의 표정부터 인생의 쓴맛, 단맛, 떫은맛 다 보고 인생 막장에 선 여인의 표정까지 그의 얼굴에서 빠르게 지나간다. 특히 “대들어, 대들어, 언니한테 대들어”라고 꾸짖으며 경분이를 나무랄 때의 그 빈정대는 말투와 몸짓은 가히 일품이다. 앞으로 인생의 파도에 꺾일 때, 특히 기자 생활이 힘들 때면 현정 언니가 들려준 명언이 생각날 것 같다. “야, 인생에 드라마가 없으면 뻥이라도 쳐서 써갈겨 내려가야 되지 않겠냐. 언니가 삶의 지혜를 이렇게 말해주면 ‘언니 고맙습니다’ 하면서 받아적어도 모자랄 판에.”

언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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