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정함이 경계심을 눅이네, 박정대의 새 시집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 신형철 문학평론가
한 달 전에 박정대의 새 시집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뿔 펴냄)이 나왔다. 이 시집 때문에 요즘 행복하다. 수불석권의 날들이다. 누가 있어 이런 시를 또 쓰겠는가. 무의미하고 무책임하고 무용한 시다. 그래서 너무나 아름다운 시다. 지금껏 네 권의 시집을 냈지만 모두가 한 권 같다. 타고난 바탕이 그러한지라 그렇게 살고 있고 그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존재와 시가 불가피한 형식으로 결합돼 있어서 도대체 체위 변경이 불가능한 것이다.
“삶이라는 극지// 그대라는 대륙// 목표도 없이, 계획도 없이 그대를 여행하는 것이 이번 생을 횡단하는 나의 본질적 계획이었네”(‘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에서) 본래 생은 낙타의 도보처럼 괴로운 ‘종단’의 길이다. 그런데 생을 ‘횡단’한다니, 생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가? 게다가 ‘목표’도 ‘계획’도 없단다. 이 낭만주의는 불치병이다. 이 불치병의 증상은 다음과 같은 시를 끊임없이 쓰는 것이다. “고독 행성에 호롱불이 켜지는 점등의 시간이 오면 생의 비등점에선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르고 톱밥난로의 내면을 가진 천사들은 따스하게 데워진 생의 안쪽에서 영혼의 국경선을 생각하네”(‘고독 행성’에서) 이 구절을 보면 그가 어떻게 시를 쓰는지 알 수 있다. 애초 그의 메모지에는 ‘고독 행성’ ‘점등의 시간’ ‘생의 비등점’ ‘톱밥난로의 내면’ ‘영혼의 국경선’ 따위의 단어들이 휘갈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 단어들이 서로 당기고 밀어내고 하다가 저처럼 결합됐을 것이다. 그는 ‘명사’들에서 출발한다. 특정한 몇 개의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게 분명하다. 만상을 차별 없이 호명하는 서정시의 길과는 다르다. 이 시인은 제 마음에 드는 것만을 솎아내서 그것들만의 배타적인 제국을 도모한다. 서정시의 사해동포주의가 아니라 낭만주의의 컬트제국이다. 이 컬트제국에서는 정치조차 아름다워야 한다. “밥 딜런을 들으며 이 세상의 모든 은행을 털 거야, 자본주의를 거덜낼 거야, 계획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어, 그래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밤을 지새우는 흑암의 전사, 말발굽처럼 달려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격렬하고도 고요한 촛불의 전사// 안개의 달 18일 결사” (‘안개의 달 18일 결사’에서) 이 치열한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에 ‘내일을 향해 쏴라’가 웬 말인가. 그러나 이런 구절들이 왜 일렁이는 것일까. 그의 목소리 때문이다. 그는 한낱 예술가의 위치에서 발화한다. ‘밥 딜런’을 들으며 은행을 털겠다고 말하는 이는 강도도 혁명가도 아니다. 그는 그저 ‘밥 딜런’을 사랑하는 무명 예술가일 뿐이다. 이 목소리에는 학자의 위선과 정치가의 야망이 없다. 그 순정함이 우리의 경계심을 눅이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거덜낼 거야” 운운하는 치기가 그냥 아름답게 들리고 마는 것이다. 이 기묘한 ‘무드’가 그의 매력이다. 예술가의 정치는 이렇게 무구하다. 그가 체 게바라를 낭만적으로 찬미할 때 그것이 거북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체 게바라를 모른다. 그냥 체 게바라의 삶이 예술작품에 가깝다는 것만 안다. 그래서 체 게바라와 로맹 가리 사이의 사상적 거리가 그에게는 무의미하다.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든 모든 이는 그의 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는 불가능의 공간을 만들고 불가능한 손님들을 초대해 불가능한 시간을 흐르게 한다. 이 낭만주의를 현실주의의 이름으로 타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낭만주의와 현실주의는 본래 서로 꼬리를 물고 있다. 지독한 낭만주의와 치열한 현실주의는 늘 서로를 알아본다. 결론을 맺자. 그는 낭만주의적인 시인이 아니다. ‘낭만주의적’인 시인은 내일모레 ‘고전주의적’인 시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낭만주의를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는 개전의 정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낭만주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가 그를 택했다. 내용과 형식이 유달리 꽉 붙어 있다. ‘박정대풍’이라고 해야 할 세계다. “할 수만 있다면 해야 하네.”(‘투쟁 영역 확장의 밤’) 이 세계의 모토다. 박정대는 ‘박정대주의자’다.

일러스트레이션/ 권남희
“삶이라는 극지// 그대라는 대륙// 목표도 없이, 계획도 없이 그대를 여행하는 것이 이번 생을 횡단하는 나의 본질적 계획이었네”(‘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에서) 본래 생은 낙타의 도보처럼 괴로운 ‘종단’의 길이다. 그런데 생을 ‘횡단’한다니, 생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가? 게다가 ‘목표’도 ‘계획’도 없단다. 이 낭만주의는 불치병이다. 이 불치병의 증상은 다음과 같은 시를 끊임없이 쓰는 것이다. “고독 행성에 호롱불이 켜지는 점등의 시간이 오면 생의 비등점에선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르고 톱밥난로의 내면을 가진 천사들은 따스하게 데워진 생의 안쪽에서 영혼의 국경선을 생각하네”(‘고독 행성’에서) 이 구절을 보면 그가 어떻게 시를 쓰는지 알 수 있다. 애초 그의 메모지에는 ‘고독 행성’ ‘점등의 시간’ ‘생의 비등점’ ‘톱밥난로의 내면’ ‘영혼의 국경선’ 따위의 단어들이 휘갈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 단어들이 서로 당기고 밀어내고 하다가 저처럼 결합됐을 것이다. 그는 ‘명사’들에서 출발한다. 특정한 몇 개의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게 분명하다. 만상을 차별 없이 호명하는 서정시의 길과는 다르다. 이 시인은 제 마음에 드는 것만을 솎아내서 그것들만의 배타적인 제국을 도모한다. 서정시의 사해동포주의가 아니라 낭만주의의 컬트제국이다. 이 컬트제국에서는 정치조차 아름다워야 한다. “밥 딜런을 들으며 이 세상의 모든 은행을 털 거야, 자본주의를 거덜낼 거야, 계획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어, 그래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밤을 지새우는 흑암의 전사, 말발굽처럼 달려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격렬하고도 고요한 촛불의 전사// 안개의 달 18일 결사” (‘안개의 달 18일 결사’에서) 이 치열한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에 ‘내일을 향해 쏴라’가 웬 말인가. 그러나 이런 구절들이 왜 일렁이는 것일까. 그의 목소리 때문이다. 그는 한낱 예술가의 위치에서 발화한다. ‘밥 딜런’을 들으며 은행을 털겠다고 말하는 이는 강도도 혁명가도 아니다. 그는 그저 ‘밥 딜런’을 사랑하는 무명 예술가일 뿐이다. 이 목소리에는 학자의 위선과 정치가의 야망이 없다. 그 순정함이 우리의 경계심을 눅이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거덜낼 거야” 운운하는 치기가 그냥 아름답게 들리고 마는 것이다. 이 기묘한 ‘무드’가 그의 매력이다. 예술가의 정치는 이렇게 무구하다. 그가 체 게바라를 낭만적으로 찬미할 때 그것이 거북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체 게바라를 모른다. 그냥 체 게바라의 삶이 예술작품에 가깝다는 것만 안다. 그래서 체 게바라와 로맹 가리 사이의 사상적 거리가 그에게는 무의미하다.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든 모든 이는 그의 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는 불가능의 공간을 만들고 불가능한 손님들을 초대해 불가능한 시간을 흐르게 한다. 이 낭만주의를 현실주의의 이름으로 타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낭만주의와 현실주의는 본래 서로 꼬리를 물고 있다. 지독한 낭만주의와 치열한 현실주의는 늘 서로를 알아본다. 결론을 맺자. 그는 낭만주의적인 시인이 아니다. ‘낭만주의적’인 시인은 내일모레 ‘고전주의적’인 시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낭만주의를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는 개전의 정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낭만주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가 그를 택했다. 내용과 형식이 유달리 꽉 붙어 있다. ‘박정대풍’이라고 해야 할 세계다. “할 수만 있다면 해야 하네.”(‘투쟁 영역 확장의 밤’) 이 세계의 모토다. 박정대는 ‘박정대주의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