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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 수없이 많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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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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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소설 전통의 흐름에서 주목할 만한 쓰시마 유코의 소설집 <나>

▣ 태풍클럽 출판 편집자

간혹 소설가들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직접 겪은 일이냐’는 질문에 작가가 “나는 그 정도로 상상력이 빈곤하지는 않다”는 식으로 답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런 질문을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쪽도 썩 좋은 인터뷰어는 못 되겠지만, 아무리 덧없는 질문이라 해도 그 안에 내포된 체험과 존재, 드러내기와 감추기의 아득한 간극 앞에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하는 쪽 역시 그다지 믿을 만한 작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정현


작가 입장에서 아무리 정직하려 해도 결국 대답은 유보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과연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인물’인가? 1980년대 여관방에서 후배 여학생과 섹스한 ‘나’와 1990년대에 그것을 후일담 소설로 써내려가는 어느 소설가의 1인칭 ‘나’는 과연 동일할까?

일본 문학에는 이른바 ‘사소설’ 전통이 있다. 개념 정리를 시도할 때마다 대략 난감해지는 용어로서, 대충 정리하자면 1인칭이든 3인칭이든 작가의 체험이 절실히 투영돼 있으면 사소설이라고들 한다. 소설가가 소설 속 사건을 대놓고 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어딘가 미심쩍은 노릇인데, 설사 그렇다 해도 어디까지가 실제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를 가늠하려 할수록 읽는 쪽은 점점 더 모호해지기 십상일 터이다. 소설이 ‘허구’를 기반으로 한다고 가정할 때, 사소설은 그 존재 자체가 이율배반적인 구석이 있다.

일본 최초의 사소설로, 여제자와의 불발로 끝난 연애를 소재로 삼아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 같은 작품은 ‘그야말로’ 너무나 사소설이어서 읽는 쪽이 살짝 민망할 정도다. 사소설을 가장 세련되게 현대화했다는 다자이 오사무쯤은 되어야 그래도 뭔가 아리송해하며 읽을 맛이 난다. 최근 일본 작가 중에서는 오사무처럼 독한 자기 부정과 부채감을 짊어지고 ‘나’를 괴롭히는 작가를 아직 만나지 못했고, 하루키 소설의 방황하는 주인공들에게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는 견해들도 더러 있으나, ‘개인주의 혹은 나르시시즘=사소설’이라는 단순 공식은 그다지 납득할 수 없다. 일본 사소설 전통의 흐름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최근작으로는 다소 형식주의적이기는 해도, 쓰시마 유코의 소설집 <나>(문학과지성사)를 꼽고 싶다.

<나>에서 ‘나’는 사소설 1인칭의 ‘나’이기도 하지만, 4인칭의 ‘나’이기도 하다. 4인칭의 ‘나’는 아이누 구전문학을 깊이 연구한 쓰시마 유코가 도입한 형식적 장치로, 죽은 자와 산 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샤머니즘적 나’이다. 아이누, 재일, 자식 잃은 어미, 어미 잃은 자식, 연락선 침몰로 수장된 아이들…. 일본 전통 사소설의 ‘나’는 어느샌가 수많은 ‘나’가 된다. 노동쟁의로 남편을 잃은 젊은 아오모리 여인의 애통한 목소리가 시공을 넘어 ‘와진’(일본인)의 전쟁에 끌려간 남편을 부르는 아이누 여인의 목소리와 합쳐지는 순간은 뭉클한 미학적 감동을 준다.

대개 사소설의 나는 결국 ‘드러내는 나’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정보를 가진 쪽이 권력을 쥐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므로 작가가 아무리 독하게 자신을 까발린다 한들 남는 것은 과정이지 오롯한 진실은 아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나’ 역시 그렇다. 선대의 부정한 치부(致富)에 대한 죄책감에서 출발한 오사무의 근대적 자기 부정과 글쓰기의 미학은 오히려 그를 신화로 만들었다. 반면 쓰시마 유코는 사소설 형식을 통해 드러내기·감추기의 전통에 얽매이기보다는 ‘일본 문학’이라는 권력을 해체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일본이라는 단일 네이션의 ‘나’, 문학전통이라는 권력적 ‘나’의 행간에 묻힌 수많은 이름 없는 ‘나’의 목소리들이 <나>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슬픔은 너무나 멀리 있고, 또 그것을 소환하는 작가의 문체나 형식이 마냥 단정하기만 한 것은 안타까운 점이지만, 그래도 이런 작가적 시도의 미덕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고 보니 이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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