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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트레이닝하다 츄리닝 입고 잠들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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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12 00:00 수정 : 2010-02-05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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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시청자는 맘상하는 ‘수준별 학습’ 코너 <개그콘서트>의 ‘개그 두뇌 트레이닝’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보고 또 보다 보면 어느새 개그맨 개개인의 개그 스타일을 간파하게 된다. 코너도 한두 번 진행되다 보면 대략 어떻게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나아갈지 짐작하게 된다. 그래서 딱히 새로운 코너나 눈에 띄는 코너가 없을 때는 빨랫줄에 걸어놓은 수건처럼 소파 위에 축 늘어져 한손에 리모컨을 들고 음량을 줄였다 키웠다를 반복하고 채널도 이리저리 돌린다. 동시에 머릿속에는 이런 대사가 스쳐 지나간다. ‘음, 저 코너에서 저 개그맨 A는 이때쯤에서 이렇게 치는 걸 좋아하지. 아마 이쯤 대사는 이거 아닐까?’라든지 ‘나는 B가 어떤 반전 개그를 구사하는지 알고 있다’라든지 ‘개그맨 C, 이제 그 비슷한 패턴 좀 그만해라. 여기서는 당연히 이렇게 치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라든지.

박준형이 김시덕, 오지헌과 손을 잡고 만든 새로운 코너 ‘개그 두뇌 트레이닝’. 의도와 아이디어는 좋지만 좀더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코너다.


다음 상황에서 5초 뒤에 벌어질 일은?

추론과 짐작, 예상이 딱딱 맞아 들어갈 때는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한 가지는 ‘나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더 새로운 아이디어, 안 되겠니?’, 또 한 가지는 ‘이제 나의 개그 내공은 어지간한 개그맨과 맞먹는구나!’. 후자의 생각이 강렬해지면 어느새 자세를 바로잡고 TV 앞에 바짝 앉아, 웃기 위해 개그 프로그램을 본다기보다 다음에 나올 대사를 맞히기 위해 본다. 이런 강박이 더 심해지면 이제 스트레스를 받을 차례다. 자신을 개그의 시험대에 올려놓고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개그 프로그램 PD가 아니기에 종종 틀린다. 그 다음 순서는 자학이다. ‘난 아직 멀었나봐!’

이런 식의 자학적 취미를 놀리기라도 하듯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에 새로운 코너가 생겼다. 코너 이름은 ‘개그 두뇌 트레이닝’. 하얀 가운을 입고 나온 박준형과 김시덕, 오지헌은 시청자에게 개그 퀴즈를 내면서 “5초 후를 예상해달라”고 주문한다. 먼저 초급. 아들 오지헌은 뜨거울 물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엄마 박준형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든다. 퇴근한 아빠 김시덕은 엄마 박준형에게 몇 시냐고 묻는다. 순간 정지. 5초가 흐르면 답이 공개된다. ‘박준형이 시계를 보느라 뜨거운 물컵을 들고 있는 손목을 돌리고 뜨거운 물이 오지헌의 얼굴에 쏟아진다’가 정답이다. 상급은 어떨까. 보리밥과 삶은 계란을 먹은 박준형과 김시덕, 오지헌이 말뚝박기 놀이를 한다. 오지헌이 술래고 박준형이 말뚝을 박은 상황, 박준형을 향해 뛰어오려는 김시덕. 여기서 또 5초가 흐르고 힘차게 달려가던 김시덕은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박준형의 엉덩이에 입을 맞춘다. 입을 맞추는 순간, 박준형은 ‘뿡’ 하면서 엉덩이 인사를 한다. 상급과 최상급도 대략 이렇게 몸으로 웃기는 상황을 주고 그 다음에 펼쳐질 개그를 맞히는 식이다.

이 코너는 지극히 박준형식의 코너다. 먼저 박준형은 항상 시청자를 향해 개그를 한다. 코너에 출연하는 연기자들이 서로를 보며 극을 설정해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항상 시청자를 보고 얘기한다. 대표작 ‘우비 삼남매’ ‘청년백서’ ‘생활사투리’ ‘마빡이’ 등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개그 두뇌 트레이닝’은 지금까지 박준형이 쭉 해왔던 형식에 개그라는 소재를 더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박준형이 늘 그래왔듯이 이 코너에서도 개그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정의를 내린다. 박준형에 따르면 ‘개그 두뇌 트레이닝’의 중급을 맞힌 사람은 ‘반상회 때 아줌마 10명을 모아놓고 6명 이상 웃길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코너를 보면서 꾸준히 수련만 하면 개그 센스가 부쩍 높아질 것만 같다.

도전 욕구를 잃어버리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이 코너에서 내는 문제는 개그 두뇌를 트레이닝한다기보다 개그 두뇌를 멈추게 할 위험성이 상당히 높다는 점이다. 개그천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더 이상 보리밥으로 인한 1차원적 신체 증상 개그에 마냥 웃지 않는다. ‘개그 두뇌 트레이닝’을 보면서 차마 정답을 맞힐 수 없었던 이유는 ‘설마, 설마 퀴즈라고 해놓고 정답이 방귀겠어? 아닐 거야’라는 절박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급이나 상급 이상이 되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말장난(예를 들어 이승환이 아파트 몇 동에 살게? ‘천일동’)도 실제 일상생활에서 응용했을 경우 비웃음이나 야유, 비난 등 상당한 사회적 타격이 예상되는 개그다.

‘개그 두뇌 트레이닝’의 의도와 아이디어는 참 좋다. 특히 나처럼 개그를 보면서 계속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나 이어질 대사를 맞히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도전 욕구를 고양시키기에는 더없이 좋은 코너다. 그러나 시청자의 개그 감각과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퀴즈와 여전히 반복되는 개그에 대한 정의 내리기는 도전 욕구를 자꾸만 잃어버리게 만든다. 박준형이 자기만의 개그 스타일을 확고하게 갖고 있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한 번쯤 그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이 코너를 풀어냈다면 어땠을까. 이 코너가 ‘마빡이’의 뒤를 잇는 <개그콘서트>의 대표 코너가 되기 위해서는 이제 박준형과 ‘개그 두뇌 트레이닝’의 두뇌 트레이닝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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