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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레닌을 위한 서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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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3-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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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밭 속 ‘그릴 수 없는 아름다운 그림’, 김정환의 <레닌의 노래>

▣ 신형철 문학평론가

지난 30여 년간 시인 김정환의 이름은 늘 어떤 ‘사건’의 이름이었다. 그의 외형은 완강한 정주형에 가깝지만 그의 정신은 늘 운동하는 유목형이다. 지난해 가을에 시집 <레닌의 노래>(열림원, 2006)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 ‘반시대적인’ 시집 제목에 적잖이 놀랐겠지만, 그것이 김정환의 시집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시집은 조용히 나와서 신속히 잊혀졌다. 김정환이고 레닌이기 때문이었을까. 시인 김정환의 위치가 그렇게 애매한 것이기도 하다. 레닌과 김정환을 아는 세대는 이미 다 아는 얘기라고 생각해서 읽지 않았을 것이고, 레닌과 김정환을 모르는 세대는 그 둘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사태가 탐탁지 않다. 그래서 소개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보름


다음 시가 이 시집의 출입구쯤 된다. 2000년대 서울의 양화대교를 건너면서 그는 탄식한다. “천지사방/ 안개밭에 갇혔다.// 여기가 어디지?// 천지사방/ 회색이 촉촉하다./ 안온한 죽음 같다.// 그 죽음을 내가 보고 있지/ 않는 듯한 나의 죽음 같아서 안온한.// (…)// 안개 속 더 아스라한 안개 산과 들 사물의/ 풍경도 소용이 없다./ 완벽한 이차원이다.// 그 갇힘을 내가 갑갑해하지/ 않는 나의 갇힘 같아서/ 압권이다.”(‘안개밭’) 1980년대 중반 기형도가 무섭도록 슬프게 묘사했던 반민주와 비인간의 ‘안개’는 2000년대 서울에 없다. 세상이 맑아졌기 때문이 아니다. 이제는 ‘천지사방’이 모두 ‘안개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벽한 2차원’을 산다. 죽어 있는지도 모르고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저 ‘안개’는 2000년대 한국의 전망(展望) 없음을 은유하면서 자욱하다. 물론 그도 인정한다. “생각해보면/ 역사가 발전을 안 해왔던 것은 아니다.”(‘그리고, 그러므로, 그러나’) 그런데 걸어온 길은 알겠는데, 걸어갈 길을 모르겠는 것이다. 전망이 정치를 낳는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는 본래적 의미의 ‘정치’가 없다. “인간이 발명한, 인간적인, 인간적이므로 찬란한/ 삶의 질을 높이는 첩경이었던/ 정치”(같은 시)가 없다. 전망은 어떻게 짓밟혔던가. “지워지는 것은 짓밟히는 것/ 지금도 거꾸로가 아니다”라고 그는 쓴다. 짓밟힌 것들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지워지는 순간 그것이 짓밟히는 것이다. 반대가 아니다. 레닌도 마찬가지다.

“레닌은 어디에/ 레닌은 어디에/ 그의 노래가 거리 풍경과 살을 섞으며/ 합쳐진다, 그것만이 위로가 된다는 듯이/ 그때 우리는 모두 레닌이다/ 지워진 것들의/ 윤곽이 슬픔으로 명징해질 때/ 그때 우리는 모두 노래다/ 그리고 레닌이 된 우리 모두가 묻는다/ 레닌은 어디에, 레닌은 어디에?/ 그 질문은 결코 메마르지 않는다/ 마치 그가 울음의, 실종의, 그리고 질문의/ 보편이라는 듯이/ 그것만이 법칙이라는 듯이”(‘레닌의 노래’) 그의 때 아닌 ‘레닌의 노래’가 요구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레닌이라는 이름만이라도 지워버리지 말자는 것이다. “레닌은 어디에”라는 반복구가 그래서 가슴을 친다. 쉰이 넘은 청년 시인의 안간힘이 아파서다.

김정환은 어디에선가 ‘전망’을 “그릴 수 없는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아끼는 후배 시인 진은영은 ‘혁명’을 두고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라고 쓴 적이 있다. 그래, 전망은 본래 그릴 수 없고 눈 뜨면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것은 끝내 있어야 한다. 앞으로 못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마저 놓아버리면 우리는 뒤로 가게 된다. 천지사방 안개밭 속에서, 뒤로 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레닌이다.

레닌을 소재로 서정시를 쓰는 사람이 있다. 오늘날 레닌에 대해 말한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결과물이 가슴을 울리는 서정시일 수 있다는 것은 더 놀랍다. 김정환은 여전히 사건의 이름이다. 때로는 이렇게 시보다 더 시적인 사건들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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