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청춘들의 자신감이 느껴지던 <풍선>을 가볍게 날린 동방신기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어떤 잡지에서 최악의 리메이크 곡 하나를 꼽아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최고의 리메이크라면 몰라도 최악을 꼽으라니, 난감했다. 리메이크라는 게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왕년의 시장에서 검증된 곡을 오늘날 되살려 다시 한 번 잘 우려먹자는 가요계의 전략이 된 지 오래다. 따라서 좋은 리메이크 곡을 찾는 게 오히려 어렵다. 음악의 위기가 어제오늘이 아닌지라, 매체에서 음악을 다루는 비중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드는 상황이다. 묻혀 있는 걸작만 소개하기에도 벅차다. 듣기조차 끔찍한 노래, 그것도 리메이크를 꼽으려니 영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청탁은 청탁,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생각해봤다. 리메이크라는 이름을 빌려서 부관참시에 가까운 만행을 저지르는 노래가 뭐가 있을까.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줄줄이 비엔나 공장의 줄줄이 비엔나처럼 쏟아진다. 한 곡만 고르기가 영 힘든 것이다. ‘재해석’이란 명분으로 원곡을 그냥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로 바꿔서 내놓는 경우야 그렇다 치자. 한데, 거의 원곡의 느낌을 살렸음에도 뻔하다는 생각은 들망정 무난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최루탄 냄새 속 다섯손가락의 추억 조금 철 지난 느낌은 들지만, 그런 노래 중 하나가 동방신기의 <풍선>이다. 원곡을 만들고 불렀던 다섯손가락과 동방신기는 비슷한 나이에 이 노래를 불렀다. 원곡이 1986년에 발표된 다섯손가락 2집에 담겨 있으니, 동방신기는 약 20년이 지나서 리메이크를 한 셈이다. 동방신기 버전은 원곡에 비할 바 없이 화려하다. 여기저기서 브라스 섹션이 빵빵 터지고 코러스도 풍성하다. 원곡이 임형순의 보컬로만 진행되는 반면 동방신기는 멤버 다섯이 돌아가면서 부르다가 합창하면서 절정을 이끌어낸다. 사운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 리메이크가 훌륭하다는 느낌은 없다. 소설이나 만화를 각색한 영화가 원작을 능가하기 힘들듯, 원작의 맛을 이미 동시대에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동시대’가 보통 시대가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1986년이었다. 다섯손가락의 <풍선>을 처음 들은 건 미술학원이었다. 오후 5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시간의 한국방송 2FM에서는 성우 장유진이 진행하는 <가요산책>이라는 프로그램을 했다. 학원 선생님이 그 프로그램을 좋아했는지 이젤 앞에 앉아 있을 때면 늘 <가요산책>이 흘러나왔다. 집에서는 내 소유의 라디오를 갖고 있지 않았으니 들국화의 <행진>, 이문세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도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야 처음 들었다. 그런 노래가 흐를 때면 붓은 자연스레 멈췄다. 선생님도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화실의 적막한 공기도 좋았다. 선생님도 꽤 예뻤다. 거기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음악 듣는 재미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화실에 가기가 싫었다. 미술학원이 대학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에서 임춘애가 라면만 먹고 금메달을 따기 전, 대학가에서는 최루탄 냄새가 진동했다. 본격적인 거리시위는 없었지만 학교 근처에는 늘 전경들이 보였다. 대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린 나이에도 신문을 통해서 뭔가 사회가 시끄럽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고, 취할 대로 취하신 아버지가 친구분들을 집으로 끌고 와 토해내는 정치 얘기에서 짐작을 더욱 굳힐 수 있었을 뿐이다. 그걸 ‘20살 갓 넘은 청춘들이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시대’ 정도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던 건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명동 다운타운 시대가 저물어가면서 신촌 음악다방에서 팝의 세례를 받고 자란 소년들이 기타를 잡고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도 그 무렵이다. 그게 들국화고 다섯손가락이었다. 스무 살에 먹고사는 걸 걱정하기보다는 자기 안에 있는 걸 표현하고 나만의 음악을 만들고자 경쟁했던 음악인들은 결국 동아기획의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학생운동이 시민들과 공명해 6·29 선언을 이끌어냈듯, 그들은 언더그라운드를 개화시키고 대중과 공명해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를 만들어냈다. 음악 창작자가 자본을 이겼던 몇 안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섯손가락의 <풍선>은 지금 들어봐도 그때 청춘들의 자신감 같은 게 느껴진다. 사회 모순에 부딪쳤던 세대만이 갖는 에너지가 담겨 있다. 스스로 만든 노래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훈련받은 스타와 가벼운 시대의 만남 동방신기의 <풍선>에도 지금 이 시대가 담겨 있는 건 맞다. 이미 창작자들은 기획사와 방송사의 커넥션에 제압당하고 설 땅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뮤지션보다는 스타가 되고 싶은 청춘들이 중학교 때부터 기획사에서 철저히 ‘스타’로서 훈련받는다. 대학가에서 사회에 대해 문제 제기라도 했다가는 두꺼운 토익책에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본질보다는 이미지가 더 중요하고, 생각을 글로 적는 것보다는 디카로 찍은 셀프샷이 더욱 시선을 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지금의 세상이 그럴 뿐이다. 밥벌이 앞에서 그 어떤 가치도 설 자리가 없는 그런 세상 말이다. 한없이 가벼운 이 세상에서 동방신기는 한없이 가볍게 <풍선>을 불렀다. 노래에 담아낼 시대의 무게가 가볍디가벼우니, 80년대의 풍선보다 더욱 잘 날아가리라.

사회에 문제 제기라도 했다가는 두꺼운 토익책에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인 시대에 동방신기는 한없이 가볍게 <풍선>을 불렀다. (사진/ 연합 김희수)
그러나 어쨌든 청탁은 청탁,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생각해봤다. 리메이크라는 이름을 빌려서 부관참시에 가까운 만행을 저지르는 노래가 뭐가 있을까.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줄줄이 비엔나 공장의 줄줄이 비엔나처럼 쏟아진다. 한 곡만 고르기가 영 힘든 것이다. ‘재해석’이란 명분으로 원곡을 그냥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로 바꿔서 내놓는 경우야 그렇다 치자. 한데, 거의 원곡의 느낌을 살렸음에도 뻔하다는 생각은 들망정 무난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최루탄 냄새 속 다섯손가락의 추억 조금 철 지난 느낌은 들지만, 그런 노래 중 하나가 동방신기의 <풍선>이다. 원곡을 만들고 불렀던 다섯손가락과 동방신기는 비슷한 나이에 이 노래를 불렀다. 원곡이 1986년에 발표된 다섯손가락 2집에 담겨 있으니, 동방신기는 약 20년이 지나서 리메이크를 한 셈이다. 동방신기 버전은 원곡에 비할 바 없이 화려하다. 여기저기서 브라스 섹션이 빵빵 터지고 코러스도 풍성하다. 원곡이 임형순의 보컬로만 진행되는 반면 동방신기는 멤버 다섯이 돌아가면서 부르다가 합창하면서 절정을 이끌어낸다. 사운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 리메이크가 훌륭하다는 느낌은 없다. 소설이나 만화를 각색한 영화가 원작을 능가하기 힘들듯, 원작의 맛을 이미 동시대에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동시대’가 보통 시대가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1986년이었다. 다섯손가락의 <풍선>을 처음 들은 건 미술학원이었다. 오후 5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시간의 한국방송 2FM에서는 성우 장유진이 진행하는 <가요산책>이라는 프로그램을 했다. 학원 선생님이 그 프로그램을 좋아했는지 이젤 앞에 앉아 있을 때면 늘 <가요산책>이 흘러나왔다. 집에서는 내 소유의 라디오를 갖고 있지 않았으니 들국화의 <행진>, 이문세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도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야 처음 들었다. 그런 노래가 흐를 때면 붓은 자연스레 멈췄다. 선생님도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화실의 적막한 공기도 좋았다. 선생님도 꽤 예뻤다. 거기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음악 듣는 재미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화실에 가기가 싫었다. 미술학원이 대학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에서 임춘애가 라면만 먹고 금메달을 따기 전, 대학가에서는 최루탄 냄새가 진동했다. 본격적인 거리시위는 없었지만 학교 근처에는 늘 전경들이 보였다. 대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린 나이에도 신문을 통해서 뭔가 사회가 시끄럽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고, 취할 대로 취하신 아버지가 친구분들을 집으로 끌고 와 토해내는 정치 얘기에서 짐작을 더욱 굳힐 수 있었을 뿐이다. 그걸 ‘20살 갓 넘은 청춘들이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시대’ 정도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던 건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명동 다운타운 시대가 저물어가면서 신촌 음악다방에서 팝의 세례를 받고 자란 소년들이 기타를 잡고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도 그 무렵이다. 그게 들국화고 다섯손가락이었다. 스무 살에 먹고사는 걸 걱정하기보다는 자기 안에 있는 걸 표현하고 나만의 음악을 만들고자 경쟁했던 음악인들은 결국 동아기획의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학생운동이 시민들과 공명해 6·29 선언을 이끌어냈듯, 그들은 언더그라운드를 개화시키고 대중과 공명해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를 만들어냈다. 음악 창작자가 자본을 이겼던 몇 안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섯손가락의 <풍선>은 지금 들어봐도 그때 청춘들의 자신감 같은 게 느껴진다. 사회 모순에 부딪쳤던 세대만이 갖는 에너지가 담겨 있다. 스스로 만든 노래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훈련받은 스타와 가벼운 시대의 만남 동방신기의 <풍선>에도 지금 이 시대가 담겨 있는 건 맞다. 이미 창작자들은 기획사와 방송사의 커넥션에 제압당하고 설 땅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뮤지션보다는 스타가 되고 싶은 청춘들이 중학교 때부터 기획사에서 철저히 ‘스타’로서 훈련받는다. 대학가에서 사회에 대해 문제 제기라도 했다가는 두꺼운 토익책에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본질보다는 이미지가 더 중요하고, 생각을 글로 적는 것보다는 디카로 찍은 셀프샷이 더욱 시선을 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지금의 세상이 그럴 뿐이다. 밥벌이 앞에서 그 어떤 가치도 설 자리가 없는 그런 세상 말이다. 한없이 가벼운 이 세상에서 동방신기는 한없이 가볍게 <풍선>을 불렀다. 노래에 담아낼 시대의 무게가 가볍디가벼우니, 80년대의 풍선보다 더욱 잘 날아가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