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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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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3-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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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강운구씨 지난한 노력의 결산 ‘마을3부작’… 사라져가는 농촌 풍경을 기록하다

사진/전시회 <마을3부작>을 열어 20년동안 간직해 온 소원을 푼 강운구씨.(강창광 기자)
20년 묵은 짐을 털어버린 기분이 그런 것일까. 전시장 입구에서 손님을 맞고 있는 사진작가 강운구(60)씨는 무척이나 후련한 표정이었다. 스스로도 “뿌듯하다”고 밝힐 정도로 강씨는 요즘 홀가분한 기분이라고 했다. 3월25일까지 서울 금호미술관(02-720-5114)에서 열리고 있는 ‘마을3부작’전은 강씨의 세 번째 개인전이지만, 사실 그에게는 첫 번째 전시회나 다름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꼭’ 제대로 발표하겠다고 20년을 기다린 끝에 비로소 마련한 전시회가 바로 이번 초대전이다. 그리고 초대전에 맞춰 전시회에 걸지 못한 사진까지 모두 모은 사진집 <마을3부작>(열화당 펴냄/02-515-3141))도 함께 나왔다. 밀린 숙제처럼 답답한 마음으로 간직해오던 두 가지 소원을 환갑을 맞아 모두 푼 것이다.

새마을운동에 위기의식 느껴

사진/용대리,1974년
일반 화랑보다 훨씬 널찍한 미술관의 두층을 가득 메운 122점의 사진들은 이제는 사라져버린 30년 전 우리 시골의 살가운 모습들을 담고 있다. 잔설이 녹아가는 논길로 군불 땔감을 지게 가득 메고 가는 농부의 모습, 포대기에 손주를 업은 시골 할머니, 여물을 끓이는 아낙들, 황토벽에 걸린 망태와 지게 등의 농기구, 나무를 다듬는 아버지 옆에서 줄넘기를 하는 여자아이…, 어느 하나 포근하고 질박한 농촌의 생활이 아닌 것이 없다. 사진 찍자고 일부러 모양새를 취한 느낌은 없다. 그저 고요한 마을 모습을 이웃집 사람이 쳐다보듯, 삶의 한 순간을 깨끗하게 잘라낸 듯 사진들은 담담하고 자연스럽다.


사진의 무대는 전시회 이름 그대로 70년대 두메산골 세 마을이다. 강원도 인제의 너와집마을 용대리, 원주시 부근의 초가마을 황골, 그리고 전북 장수군의 건새집마을 수분리 등 세곳이다. 72년부터 79년까지 강씨는 거의 해마다 마을을 찾아갔다. 마침 새마을운동의 노랫소리와 함께 온 나라 시골에 불도저 소리가 요란하던 때였다. 초가지붕은 사라지고 현란한 슬레이트를 덮은 시멘트집들이 시골풍경을 바꾸고 있었지만, 워낙이나 깊은 산골이었기에 세 마을 모두 전통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소나무 널빤지로 지붕을 얹은 용대리의 너와집도, 지푸라기 대신 억새풀 줄기로 이엉을 엮어서 지붕을 인 수분리의 건새집도, 황골의 초가집도 다 사라져버렸다.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아련한 시절의 풍경이 화석처럼 강씨의 사진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아마 이 사진들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줬다면 80년대에 책도 내고 전시회도 했을 거예요. 여기저기 사진을 들고 찾아가봤지만 다 퇴짜를 맞았거든요. 그래서 부분적으로만 잡지 지면 등에 발표를 해오다가 이번에 제대로 모아서 열게 된 겁니다.”

이번 전시회 사진은 작가 강운구씨의 작품세계로 보면 제2기에 해당한다. 대학생 시절에 일찌감치 작가로 데뷔해 무작정 ‘예술사진’에 빠져 있었던 강씨가 비로소 다큐멘터리 작가로 첫발을 내디딘 것이 이 마을3부작 사진들이었다. 자기 스스로 사진의 방향을 찾아 매달리던 도중인 75년, 강씨는 직장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른바 ‘동아투위’(동아언론자유실천투쟁위원회) 사태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다잡고 진정으로 사진에만 매달렸고, 덕분에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작가 강운구로 자리를 잡았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그 시기를 처음으로 정리하는 만큼 이번 전시에 대한 그의 애착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그저 사진에 덮어놓고 반했고, 그래서 예술한다고 무조건 달려들었어요. 그때는 ‘사과를 사과로 찍는 게 아니라 수박처럼 찍어야 예술’이라고만 여겼어요, 남들도 그랬고….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생각한 사진은 이게 아닌데…’ 하는 아쉬움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나온 사진사 책을 다시 들입다 파고 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이 ‘사과는 사과로 보이게 찍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당시 강씨와 사진의 길을 다시 정한 동료이자 친구가 바로 사진작가 주명덕씨였다. 서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다큐사진이란 ‘안 팔리는’ 사진으로 방향을 정했고, 강씨는 첫 번째 다큐멘터리 사진의 주제로 ‘농업’을 골랐다. 그 이유는 불현듯 솟아난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우리의 문화와 풍습, 반만년 역사의 전통이 모두 농업에서 나온 것인데 군사정권의 개발드라이브는 그 가치를 모두 부정하고 나섰다. 이대로 가다가는 농업이, 농촌이 완전히 피폐화되겠다는 걱정에 “없어지기 전에 찍어놓자”고 일단 시작했다. 덮어놓고 산마을을 헤맸고, 보는 것마다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몇년을 계속해서 찾아가다보니 나중엔 주민들과 오랜 친구처럼 친해질 정도가 됐다고 한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사진/황골,1974년(위). 용대리,1977년(아래).
그가 요즘도 못내 아쉬워하는 것은 당시 더 많이 농촌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놓지 못한 것이다. 조금더 오지랖이 넓었다면 아예 팀을 만들어 분야를 나눠 찍었을 텐데, 혼자 하다보니 혼자 능력의 범위만 다룰 수밖에 없었다는 아쉬움이다. 그래서 많은 사진거리들이 사라진 지금 더 가슴이 아프고 “팀을 짜서 못한 것이 실수라면 더 큰 실수”라며 안타까워한다.

강씨는 지금도 농업이란 주제를 놓지 않고 있다. 전시회를 마치고 다시 그가 카메라를 들이댈 대상은 우리의 농촌과 농업이다. 물론 세상은 많이 바뀌었고, 바뀐 세상이 강씨에겐 반갑지 않다. 소쟁기로 갈던 밭에는 휴대폰 통화를 해가며 트랙터를 모는 모습이 일상화됐고, 그걸 찍는 강씨로선 신이 나지 않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다뤄왔던 주제의 연장선에서 역시 지금의 농촌도 기록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작업을 계속하는 측면이 더 크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그래서 더 이번 사진들을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요새 젊은이들은 자기네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걸로 압니다. 그런데 당신들 아버지 때가 어땠는지 보라는 것이지. 할아버지 때가 아니라 아버지 때만 해도 이랬다는 걸 말이에요. 논리적 강요는 아니고, 한번 느껴보라 이겁니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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