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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타석에 부는 ‘황색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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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3-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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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서 가능성 인정받은 최희섭과 이치로… “동양인은 투수만 통한다”라는 편견에 도전

사진/최희섭의 포지션인 1루는 메이저리그에서도 힘있는 타자들의 전유물이다.(AP연합)
메이저리그의 시범경기 중에서 캑터스리그가 열리는 애리조나에서 두명의 동양타자가 관심을 끌고 있다. 정확하게는 타자라기보다 포지션 플레이어(Position player)다. 포지션 플레이어란 투수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타격은 물론 수비의 임무까지 수행한다는 데서 붙여졌다. 1983년 마이너리그 노스웨스트리그 메드포드 에이스의 감독 데니스 로저스가 <베이스볼 아메리카>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사용한 이래 포지션 플레이어는 투수가 아닌 야수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자리잡았다.

‘힘’에 주눅들 필요 있나

최희섭(22·시카고 컵스)과 이치로 스즈키(28·시애틀 매리너스). 포지션 플레이어인 이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유는 타자로 메이저리그를 노크하는 동양의 선구자라는 점 때문이다. 1980년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2루수와 유격수로 재치있는 수비를 뽐냈던 레니 사카타가 있었지만 그는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인 3세였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나고 자란 타자가 메이저리그에 본격적으로 도전하는 것은 올해가 원년인 셈이다.


지금까지 메이저리그에서는 LA 다저스 박찬호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김병현, 보스턴 레드삭스의 노모 히데오, 시애틀 매리너스의 사사키 가즈히로 등 많은 선수들이 성공을 거뒀지만 투수에 편중돼 있었다. 따라서 동양타자의 성공여부는 한국과 일본은 물론 메이저리그에서도 적지않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미국이나 도미니카공화국을 비롯한 중남미 선수들의 독무대로 여겨졌던 타자들의 아성에 동양인 타자들이 도전하는 것이 자못 흥미롭다는 투다.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는 반면 회의론도 있다.

사진/시범경기 개막전에서 3점 홈런을 날린 최희섭.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그를 미래의 홈런왕으로 평가한다.(AP연합)
메이저리그가 미국의 영역을 벗어나 중남미 선수들을 주공급원으로 하다가 아시아까지 눈을 돌리게 된 이유는 선수기근 현상 때문이다. 고등학교 정도 수준에서 우수한 운동선수를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나 미국프로농구(NBA)에 뺏기는 게 메이저리그의 현실이다. 메이저리그가 스타가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데 비해 풋볼이나 프로농구는 본인의 재능이 곧바로 드러나기 때문에 선수들 스스로 빠른 성공을 선택하고 있다. 물론 미국의 스포츠 각 종목이 ‘글로벌 아메리카’를 기치로 내세워 NBA의 경우도 유럽의 고등학교 선수를 무차별 스카우트하기도 하지만 아직 야구만큼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아니다. 야구에서의 글로벌 아메리카는 선수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허울일 뿐이다.

메이저리그가 아시아 지역에서 먼저 투수쪽으로 눈을 돌린 것은 ‘동양인은 키가 작고 힘이 없다’는 편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투수도 힘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타자의 경우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적응하기 더 힘들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포지션 플레이어는 타격은 물론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한 수비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의 시각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타자는 안 된다고 지레짐작, 아무도 도전하지 않으려고 한 게 사실이다. 메이저리그를 휘젓는 미국이나 중남미 선수들의 힘에 겁먹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힘이라는 것이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음에도 그랬다.

최희섭 “미래의 홈런왕이라 불러다오”

사진/이치로는 최희섭에 비해 왜소한 편이지만 정확한 타격기술만큼 정평이 나 있다.(AFP연합)
역설적으로 동양투수들의 성공이 타자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촉발했다. 박찬호나 노모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무렵 성공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으나 결국 성공을 거뒀고 많은 투수들이 뒤를 따랐다. 여기서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타자들이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평균적으로 미국인의 체구가 한국이나 일본사람에 비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야구는 ‘평균치의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다.

이에 대해 최희섭은 “겁먹을 필요는 전혀 없다. 야구는 어디에서 하나 똑같다. 어떤 점에서는 한국선수들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더 강하다는 것을 느낄 때도 있다. 문제는 몸을 관리하는 부분이다. 미국 애들도 몸관리를 못하는 선수들이 처진다. 동양인들도 타자로서 충분히 성공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야구의 본고장이라는 메이저리그에서 많은 동양타자들이 성공했으면 좋겠다. 이치로도 그런 시각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최희섭과 함께 시카고 커브스 산하 마이너리그 포수로 뛰다 올해 메이저리그 시범경기에 참가하고 있는 권윤민(23)도 “지난해 처음에 뛸 때는 정말 힘들었다.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감이 생기고 나자 해볼 만하다고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최희섭과 이치로는 체격이나 타격스타일,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고려대 1학년을 마치고 미국에 발을 디딘 최희섭은 197cm에 115kg의 거구다. 미국이나 중남미 선수들에 비해 일단 체격에서 전혀 뒤질 게 없고 오히려 그들을 능가한다.

힘을 바탕으로 한 파워스윙이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스윙이 아주 유연하다. 얼마 전 메이저리그 사무국(MLB)은 올 시즌의 안내책자를 발행하면서 최희섭에 대해 ‘메이저리그 미래의 홈런왕’이라고 평가했다. 메이저리그에 각종 통계를 제공하는 스태츠는 마이너리그 스카우팅 노트북에서 최희섭에게 A등급을 매겼다. A등급은 장차 메이저리그 주전선수는 물론 스타나 슈퍼스타로 발돋움할 것으로 예상되는 선수다.

최희섭은 한국에서 프로야구 경험이 전혀 없다. 1999년 싱글A를 시작으로 지난해 더블A팀까지 뛰었다. 올해 메이저리그의 시범경기에 초청선수 자격(non-roster invitee)으로 참가하고 있지만 아직 메이저리그에 승격된 적이 없는 유망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지난 겨울 이후 최희섭이 미국 언론으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은 것은 10년 넘게 커브스의 터주대감이었던 마크 그레이스를 쫓아냈다는 것과 ‘홈런타자’라는 이유에서다.

시범경기 개막전에서 미국인들이 깜짝 놀란 150m짜리 3점홈런을 날린 이후 주가가 더 올랐다. 최희섭의 포지션인 1루는 메이저리그에서도 힘있는 타자들의 전유물이다. 최희섭을 스카우트한 커브스의 레온 리는 최희섭에 대해 “동양선수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체격을 지녔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톱클라스다. 그런 체격에 유연함까지 갖춰 장차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타자로 성장할 게 확실하다. 커브스구단도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집중 육성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리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10년을 뛴 가운데 타격왕을 한번 차지했고 통산타율이 3할을 넘길 정도로 타격에는 일가견이 있다.

방망이 치는 건 어디나 똑같다

사진/올해 메이저리그 시범경기에 참가하고 있는 권윤민도 자신감을 표명하고 있다. (연합)
현지에서 평가하는 최희섭의 강점은 타격의 재질뿐만 아니라 적응에 두려움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언어와 음식을 비롯한 문화의 차이를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야구의 기술적인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지적되는 대목이다.

이에 비해 이치로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이미 슈퍼스타가 된 이후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경우다. 오릭스 블루웨이브 소속으로 7년연속 퍼시픽리그 타격왕을 차지했다. 178cm, 80kg으로 최희섭에 비해 ‘왜소한’ 편이지만 정확한 타격기술 만큼은 정평이 나 있다. 이치로에 대해서 시애틀의 루 피넬라감독은 “방망이를 치는 것은 미국이나 일본이나 아프리카나 다 똑같다”는 한마디 말로 성공을 확신했다.

메이저리그는 타격의 야구다. ‘투수는 캐딜락을 몰지만 홈런타자는 벤츠를 몬다’는 건 오래 전부터의 풍속도다. 물론 월드시리즈를 우승하기 위해서는 아주 뛰어난 투수가 필요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경기를 이기는 것과 팬들의 인기를 포함한 야구의 재미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투수에 초점을 맞춰 관전하던 메이저리그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의 포지션 플레이어도 체격과 기술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양성동/ 스포츠서울 LA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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