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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쫀득한 21세기형 ‘고춘자 장소팔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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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2-08 00:00 수정 : 2010-02-0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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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빈·이재형·한현민으로 구성된 ‘기글스’가 펼치는 만담의 세계…‘희한하네’부터 ‘트로트극장’까지 오가는 대사 속에 엿보이는 내공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고춘자·장소팔’은 만담의 동의어다. 직접 그들의 만담을 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몇 개의 영상물을 보면 고춘자와 장소팔은 찰떡을 반으로 갈라 둘로 나눈 것처럼 착착 맞아들어간다. 달에 있는 계수나무 아래서 절구를 찧는 토끼 두 마리의 호흡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그들의 만담에는 ‘희한하게’ 중독성이 있다. 만담 내용이 기발하거나 대단한 것도 아니다. 만담의 시작은 “고춘자씨, 어딜 가는 길이세요?”나 “장소팔씨, 왜 이름이 장소팔이세요?”처럼 평범하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그들의 만담이 재미있는 이유는 첫째 찰떡호흡이고, 둘째 대화를 조금씩 비틀어가는 재치다. 그래서 1950~1960년대 ‘고춘자 장소팔 쇼’가 동네에 펼쳐지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 모두 모여서 그들의 만담을 구경했단다. 이어지는 가수들의 노래잔치와 서커스도 항상 넘치는 박수를 받았다.

‘기글스’의 이재형·한현민이 출연하고 있는 <웃찾사>의 ‘트로트극장’. ‘희한하네’부터 ‘얘길 하지’까지 하나의 맥으로 이어져온 기글스식 개그는 ‘트로트극장’에서 꽃을 피운다.


“정신차려요” “점심은 차려먹었네”

개그의 춘추전국 시대인 지금 고춘자와 장소팔식의 주거니 받거니 개그가 보고 싶다면, 먼저 이들을 주목해야 한다. 조영빈·이재형·한현민 라인업으로 이뤄진 ‘기글스’다. 이들이 <웃찾사>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희한하네’였다. 말을 하고 동시에 잊어버리는 건망증을 소재로 한 이 코너에서 이 세 명은 착착 들어맞는 개그를 선보였다. 학생에게 물을 떠오라고 시킨 선생님, 그러나 곧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출석을 부른다. 선생님은 빈손으로 돌아온 학생에게 왜 늦었냐고 채근한다. 물론 학생은 물을 떠와야 한다는 것을 이미 잊어버린 상황. “이상하게 목이 칼칼하다”는 기분이 든 학생은 다시 물을 뜨러 가고 선생님은 어디 가냐고 나무란다. 이어지는 대사는 “이상하게 목이 마르네. 어! 이 장면을 꿈에서 본 것 같애” “나두나두!” “어, 희한하네!”

코너는 매번 조금씩 달라지면서 무한 반복된다. 지루할 법도 한데 코너가 진행될수록 ‘희안하게’ 집중력은 더 높아진다. 집중력 향상에 가장 큰 구실을 하는 것은 반박자 빠른 이들의 대사다. 반응을 기다렸다가 대사를 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대사가 끝나기 무섭게, 그렇게 나올 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치고 들어온다. 그렇게 주고받는 대사는 미묘한 리듬을 타고 흘러간다. ‘희한하네’의 인기를 이어받은 코너는 ‘희한하네2’다. ‘희한하네’가 하나의 상황을 반복하는 식이었다면 ‘희한하네2’는 ‘어디서 본 것이 틀림없는’ 상황들을 끌어다놓는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부터 2% 부족한 광고, 영화 <실미도>까지 ‘어디선가 본 것이 틀림없는’ 온갖 장면들을 쉴 새 없이 꺼낸다. 코너 중간중간 맥을 잡아주는 유행어도 빼놓지 않는다. “앵앵 앵간히 해(어지간히 해)”와 자기비하성 유행어 “어차피 저는 (삐리리)니까요”, 두 손바닥을 앞으로 나란히 하고 오른쪽으로 두 번 돌리면서 앞으로 내미는 “긴장 좀 허자~”까지.

다음 코너는 ‘KSI 지식수사대’다. 한국방송 <스펀지>와 를 섞은 이 코너에서는 ‘희한하네’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공개개그치고) 훌륭한 세트와 소품 대신 스탠딩 개그 형식을 선택했다. 조영빈·이재형·한현민 이 셋은 나란히 서서 “토 토 토 달지 마”나 “대단하구만” 등의 유행어를 밀면서 정직한 만담 개그를 선보였다. 그러나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들의 행보는 ‘얘길 하지’로 이어진다. 영어로 얘기하면 구타하고 싶어지는 이재형과 기막히게 구타를 막아내는 조영빈의 캐릭터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이 코너에서 단번에 눈을 사로잡은 캐릭터는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협객’ 캐릭터다. 영화 <괴물>의 ‘한강찬가’가 흘러나오면 XL 사이즈의 바바리코트에 줄무니 스타킹을 신고 중절모를 쓴 어색한 신사 한현민이 등장한다. 한현민과 이재형의 대사는 21세기형 만담 교과서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다. “장난해요?” “장남이 아니라 막낼세.” “왜 나타났어요?” “낙타는 본 적 없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문소리가 집들이를 해?” “정신차려요.” “점심은 차려먹었네.” “돌겠네!” “돌김 먹은 건 어떻게 알았나?” “장난해요?” “장남이 아니고 막내라도 그러네!” 칼칼한 목소리로 “오래전부터 자네를 쭉 지켜봐왔네, 그래 무슨 일인겐가”까지 하면 웃다가 쓰러진다. 이 캐릭터는 코너가 없어진 뒤에도 ‘형님뉴스’에서 살아남아 아직도 일주일에 한 번씩 정신을 쏙 빼놓는다.

만담·노래·서커스 섞은 ‘트로트극장’

만담이 끝나면 쇼가 이어진다. 쇼에서 노래와 서커스를 빼놓을 수 없듯이 기글스에게서도 노래와 서커스를 빼놓을 수 없다. 만담 개그에 노래, 서커스까지 들어 있는 종합선물세트는 현재진행형인 코너인 ‘트로트극장’이다. 이 코너는 예전에 컬투가 트로트 노래를 부르며 진행했던 ‘랄랄라극장’의 기글스판이라고 할 수 있다. ‘트로트에 살고 트로트에 죽는다’를 표어로 걸어놓고 한쪽에는 카바레 무대가, 다른 한쪽에는 트로트고등학교 교실이 펼쳐진다. 청아하게 울려퍼지는 트로트 네 박자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대사는 지금까지 쌓아놓은 기글스의 내공을 느끼기에 충분한다. 게다가 이재형과 한현민 콤비에 주책맞은 노부부 만담의 지존인 김용현·현병수, 눈빛으로 통하는 퀸카자매 정주리·김현정까지 총출동해 시끌벅적한 판을 벌인다. 이 정도면 ‘고춘자 장소팔 쇼’가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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