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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 한국인, 그 신기한 동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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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1-26 00:00 수정 : 2010-02-0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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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경쾌하고 날카로운 한국인 분석 <호모 코레아니쿠스>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진중권 교수의 새 책이 나왔다. <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지식하우스 펴냄, 1만3천원). 그의 새 책이 나왔다는 것 자체는 별로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한다. 책의 표지가 닳기도 전에 다른 책이 나올 테니까.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한국인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다작이라는 면에선 한참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강준만 교수도 일전에 <한국인 코드>에서 한국인을 도마 위에 올린 적이 있다. 요즘 유행일까?

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짚고 가야 할 문제 하나. 단일한 특성을 가진 ‘한국인’이라는 집단을 상정할 수 있는가. 진 교수와 강 교수 모두 이 문제엔 매우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이유로 한국인의 속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강준만 교수는 서구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는 한국 학계의 풍토에 반발하고, 우리의 현실을 우리의 토대 아래 바라보고자 한다. 그는 한국인의 특성들을 추출해서 그것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균형 있게 관찰한다. 따라서 그에게 우리의 근대는 서구의 근대와 그냥 다른 것이다. 진중권 교수는 이 책에서 한국인만이 갖고 있는 단일한 민족성이나 정체성 같은 개념은 거부하면서, 자신의 시도가 익숙해져 있는 제 문화를 ‘낯설게 보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난 뒤 한때 그의 신경과 오감에 낯설게 다가왔던 것들, 한국인의 신체, 한국인의 습속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 외부의 시선으로 한국인의 몸을 관찰하는 것. 그에게 우리의 근대는 서구의 근대에 비해 왜곡되고 열등한 것이다.


책은 한국인의 습성을 진중권 특유의 경쾌하고 날카로운 문장으로 파헤치고 있다. 1장은 근대화를 다룬다. 살인적인 속도로 진행된 근대화가 한국인의 신체를 어떻게 마음껏 구겨서 끼워 맞춰놓았는지 관찰한다. “일본인들이 게으르다고 했던 조선인의 몸. 몇십 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자본주의적인 신체가 되었다.” 근대화의 첫 번째 단추는 인간개조다. 여기엔 정치적 성격인 ‘국민의 군대화’와 경제적 성격인 ‘합리적 생산 시스템’이 작동한다. 대학 정문에서 교통정리를 하다가 교수의 차량인 지나갈 때마다 거수경례를 붙이는 복학생들, 포로수용소를 연상시키는 학교의 조회 등 불필요한 세리머니는 ‘군대화’를 상징한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가면서 과거에 국가가 하던 훈육을 지금은 시장이 대신하는 듯한 모습이다. 아직도 신입사원들에게 유격훈련을 시키는 시대착오적인 회사들이 이를 증명한다.

인간개조 작업은 ‘회사인’을 탄생시킨다. 신임 사장이 마라톤 성적을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바람에 무리해서 마라톤 연습을 하다가 쓰러져 숨진 어느 노동자. 여기엔 제 몸을 기업의 요구에 맞게 자발적으로 뜯어고치는 한국인들의 비극이 숨겨져 있다. 출세를 위해선 인사하는 각도, 명함 주는 자세, 웃음까지 회사의 요구에 맞춰야 한다.

책의 2장은 한국인의 습속에 숨은 전근대성을 관찰한다. 지은이는 전근대성의 문제를 서구‘문명화의 과정’이 부재했던 우리의 역사와 연결짓는다. 엘리아스에 따르면 감정적이고 호전적이었던 중세의 기사들은 왕권이 강화되면서 궁정에 들어와 가신으로 변모하며 ‘궁정적 합리성’을 갖추게 된다. 부르주아 계급이 진출하면서 ‘궁정적 합리성’은 ‘상인적 합리성’으로 대체되며 귀족의 교양은 시민계급에 흡수된다. 그러나 한국은 양반계급의 교양이 시민에게 확산될 기회를 갖지 못했고, 급격히 이식되고 진행된 서구식 근대화는 ‘문명화’와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우리는 중세 기사들이나 가질 법한 ‘전사 기질’을 자랑한다. 뿐만 아니라 논리적 토론은 빈약하고 정념과 감동은 과잉이다. 귀족계급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시민사회로 전이되지 못한 탓에 양반문화는 속이 텅 비어버렸고 스스로 천박해졌다. 그것은 과시나 쓸데없는 ‘체면문화’ 등으로 나타난다.

3장은 디지털 시대의 한국인을 다룬다. 디지털 시대에 대한 그의 논의를 여기서 요약하지는 않는다. 이 문제에 관해선 앞으로 더 진화된 그의 글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한 가지 의구심만은 남겨둔다. 디지털 시대에 대한 과잉평가의 혐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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