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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세돌 반란’ 막을 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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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3-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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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배 세계기왕전에서 이창호에게 2연승… 힘에 정교함까지 가세 “무섭네, 무서워”

핵주먹 타이슨이 무명의 복서 더글러스에게 K.O패 당하던 ‘도쿄반란’의 순간이 이랬을까. 이틀간의 연이은 패배. 그것도 모두 대마가 비명횡사하는 치욕스런 결말이었다. 이겨놓고도 눈앞의 완벽한 승리를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의 이세돌 3단. 오히려 맥없는 웃음을 보인 건 이창호 9단이었다.

그보다 정작 더 큰 충격을 받은 쪽은 관전자들이었고 이창호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전국의 전세계의 바둑팬들이었다. 5번기로 치러지는 결승기인 만큼 아직 승부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신예 이세돌이 세계 최강 이창호를 상대로 내리 두판을 앞서간다는 것 자체가 대파란이었다. 바둑계에선 이를 ‘이세돌 반란’이라 명명했다.

아버지와 형의 희생 속에서


사진/2000년 8기 배달왕기전 결승. 이세돌은 이를 시작으로 천원 타이틀을 차지하며 2관왕에 올랐다.(월간바둑)
2월26∼27일 이틀간 서울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린 제5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 5번기는 ‘황제’와 ‘황태자’의 대결로 일찌감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다. 세상이 다 알아주는 바둑황제 이창호 9단과 떠오르는 한국바둑의 황태자 이세돌 3단의 대결은, 기풍으로 봐도 ‘창’과 ‘방패’의 승부인 만큼 실로 오래간만에 이루어진 빅카드였다. 물론 객관적인 전력은 이창호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대국전야 리셉션 무대에 오른 이세돌 역시 “이기면 좋고, 져도 경험을 쌓는다는 마음으로 두겠다”는 겸손한 속내를 내보였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황제의 참담한 패배였다. 링에 오르자마자 상대의 변칙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해 허둥대던 황제는 ‘어어’ 하다가 어처구니없는 다운을 허용했고, 2회전에선 상대를 코너에 몰아놓고도 결정적인 순간에 카운터블로를 맞아 또 한번 링 바닥에 길게 드러눕고 말았다.

이세돌은 한국바둑이 낚아올린 2000년 최대 월척이다. 파죽의 32연승으로 2000년 새해 벽두부터 바둑계를 놀래키더니 하반기에 이르러선 제5기 박카스배 천원전과 n016배 제8기 배달왕기전 타이틀을 연거푸 따내며 2관왕에 올라 일약 슈퍼스타로 급부상했다. 이창호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연간 최다승(75승)도 2000년엔 이세돌의 몫이었다. 이창호 9단을 물리치고 2000년 MVP인 최우수기사상도 거머쥐었다.

이세돌은 전남 신안군에 딸린 비금도(飛禽島)라는 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원조 ‘섬소년’이다. 목포에서 가산행 뱃길을 따라 2시간 남짓 들어가야 하는, 오지라면 오지라 할 이런 벽촌에서 도대체 어떻게 이세돌과 같은 바둑천재가 나올 수 있었을까?

비금도 스토리를 말하기 위해선 이세돌의 부친 이수오(98년 작고)씨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이세돌의 첫 바둑스승이었으며, 상훈과 세돌 형제를 모두 프로기사로 만들기까지 그야말로 드라마 같은 인생역정을 보낸 사람, 이씨는 확실히 기인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목포에서 초등학교 훈장노릇을 하던 그는 어느 날 뜬금없이 식솔을 모조리 이끌고 고향인 비금도로 낙향, 교편 대신 호미를 잡았다.

막내인 세돌에게 바둑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다섯살 무렵이었다. 형 상훈도 만만치 않았지만 세돌의 기재는 무서울 정도였다. 아마5단 기력을 지닌 이씨는 아침 일찍 과수원으로 일을 나가면서 세돌에게 사활문제(死活問題·대마의 생사가 걸린 맥을 찾는 문제)를 내어주고 틈틈이 돌아와 이를 점검하는 독특한 수업방식을 고안해냈다. 현재 여류 아마강자로 활동하고 있는 누나 세나씨는 “또래 아이들처럼 밖에 나가 뛰놀지 못하고 매일 사활문제와 씨름하고 있던 세돌이의 안쓰러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2년 뒤 세돌은 아버지와 맞바둑이 되고, 이 무렵 전국어린이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다. 때마침 서울에서는 형 상훈이 프로입단에 성공했다는 낭보가 전해왔다. 이씨로서는 더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세돌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자 형의 뒤를 이어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형이 지도사범으로 일하고 있는 권갑용 도장에 여장을 풀었다. 동생에 대한 형 상훈의 노력 또한 아버지 못지않은 헌신적인 것이었다. 상훈의 희생은 조치훈 9단을 키운 형 조상연 5단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자신 역시 현역에 몸담은 승부사였건만 세돌의 입단은 모든 것에 우선했다. 세돌의 스승이었던 권갑용 7단은 당시의 세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2000년 대도약, 불패신화!

사진/LG배 세계기왕전 결승 1국(위). 이세돌 3단의 변칙스타일에 허둥대던 이창호 9단은 결국 패하고 말았다.결승 2국의 기보. 이 9단은 백A에 들여다봐 흑B를 교환한 뒤 백C로 치고나와 일전불사를 외쳤으나 거꾸로 대마를 잡혔다. (월간바둑)
“참 묘한 놈이었죠. 하여튼 어려서부터 바둑밖에 몰랐어요. 기재가 대단했죠. 단점이라면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려고 한다는 점인데, 그런 튀는 성격 때문에 주변에선 특이한 시선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95년 7월2일. 마침내 세돌은 입단의 관문을 뚫는다. 3전4기 만이었다. 세돌의 입단을 지켜본 상훈은 이틀 뒤 홀가분한 심정으로 입영열차에 올랐다. 이제야 아버지를 뵐 낯이 서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입단 뒤 세돌의 성적표는 이상하게도 늘 기대치를 밑돌았다. 여전히 한국바둑계를 이끌어갈 유력한 후계자로, 다크호스로 각광을 받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바래져 갔다. ‘이름값’ 하나만 믿고 어물어물하다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 후배들에게 추월당하고 마는 것이 이 바닥이다. 한때 출중했지만 곧 하강세에 들어섰던 선배 소년기사들처럼 세돌 역시 이런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97년, 세돌은 대도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서봉수 9단을 제치고 대왕전 도전자 결정전에 오른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14살3개월의 나이로 제2회 LG배 세계기왕전 본선에 진출해 세계대회사상 최연소 출전기록을 세운 것도 대단했다.

2000년이 되자 마침내 세돌은 움츠렸던 스프린터처럼 힘차게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파죽의 32연승은 그 서막에 불과했다. 이때 얻은 별명이 바로 ‘불패소년’. 90년 당시 41연승 가도를 달리던 이창호의 별명, ‘지지 않는 소년’의 리메이크 버전이었다.

10월에는 또 하나의 진기명기가 연출됐다. 신예기사들만이 출전하는 제4기 신예 프로 10걸전에서 형 상훈과 함께 나란히 결승에 진출해 세계바둑사상 전대미문의 형제 결승대결을 펼친 것이다. 세돌은 이 결승전 시리즈에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를 연출하며 형에게 우승컵을 넘겨(?)주었다.

기세를 탄 이세돌은 연말 한달 간격으로 배달왕과 천원 타이틀을 차지하며 순식간에 국내 2관왕에 올랐다. 그리고 이번에 돌풍의 무대가 된 제5회 LG배 8강전에서는 ‘아마조네스의 전사’로 불리는 여류최강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을, 준결승에서는 중국 랭킹 1위 저우허양(周鶴洋) 9단을 보란 듯이 제압하고 결승에 올랐다. 루이나이웨이나 저우허양이나 최근 ‘이창호 킬러’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기사들이었기에 승점의 의미가 더욱 컸다.

이런 이세돌의 급성장은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일견 이변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만큼 반짝스타로 명멸할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오랜 기간 바둑계를 관찰하며, 관전기를 집필해 오고 있는 바둑평론가 L씨의 이세돌론을 잠시 빌려보자.

“바둑사를 돌이켜볼 때 롱런을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펀치력이 좋아야 한다. 계산형 바둑보다는 힘바둑을 구사하는 기사가 오래 간다. 그런 점에서 이세돌은 롱런의 요건을 충분히 갖춘 기사이다. 또래의 어린 기사들이 이창호의 계산을 흉내내기 위해 골몰할 때 이세돌은 미련스러울 정도로 샌드백만을 두들기며 자랐다. 이제 주먹이 충분히 굵어졌고, 여기에 정교함이 더해졌다. 그가 강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천재의 경솔함’ 극복했다

사진/ 이세돌의 형 성훈(위 사진 왼쪽)의 노력도 아버지 만큼이나 헌신적이었다. LG배 준결승전에서도 이세돌은 중국 랭킹 1위 저우허양 8단을 물리쳐 파란을 일으켰다(위). (월간바둑)
천재형의 기사들은 대개 수를 빨리 보고, 또 수를 빨리 낸다. 그래서 천재기사들의 계보를 들춰보면 십중팔구 속기파들이 득세를 한다. 하지만 속기는 경솔을 부르고, 경솔은 ‘덜컥수’를 낳는다. 이는 조훈현, 유창혁과 같은 속기파 천재형 기사들이 왜 자꾸만 이창호에게 지는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세돌 역시 초속기파에 속한다. 그런 이세돌의 시간 소모량이 최근 들어 부쩍 늘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한시간을 모두 소비한다는 것은 그만큼 바둑을 진지하게 두고 있다는 증거다. 제한시간의 소모량에 비례해 세돌의 성적은 가파른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조치훈 9단 천하를 무너뜨리고 현재 일본바둑을 제패하고 있는 왕리청(王立誠) 9단은 요즘처럼 성적을 내기 전에는 무지막지한 힘바둑, 싸움바둑이었다. 그러나 승부세계에서는 아무리 항우 같은 힘을 지녔다 한들 지략을 앞세운 유방을 당해내지 못한다. 왕리청 9단이 자신의 능기인 힘을 근저에 깔고 냉철한 형세판단을 앞세우며 실리바둑으로 돌아선 시점에서부터 그의 승률이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점은 이세돌 3단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 한 가지, 이번 이창호 9단과의 대결에서 이세돌 3단은 탁월한 전략가적 안목도 갖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치밀한 작전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이창호 9단의 아킬레스건이 포석과 공격에 있다는 점을 평소 연구로 파악했고 따라서 두판 모두 초반부터 철저한 실리작전으로 나서 상대가 공격나팔을 불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유도했던 것이다. 결국 돌부처란 별명답지 않게 흥분한 이창호 9단이 무리한 공격을 감행했고 그 과정에서의 서투른 공격이 승부의 명암을 갈랐다.

예를 들면 ‘기보·결승2국’의 장면이 그것이다. 이 대목에서 백(이창호 9단)이 1로 꼬부려 수상전을 펼쳤으면 흑이 곤란했을 것이다. 이후의 수읽기가 좀 까다롭기는 하지만 이창호 9단의 기력을 감안하면 이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실전에서 이 9단은 백A에 들여다봐 흑B를 교환한 뒤 백C로 치고나와 일전불사를 외쳤고, 급기야 백의 대마가 거꾸로 몰사하는 참극을 당했다. 도저히 이창호의 선택이라고 믿기 어려운,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당한 이번 연패에는 보이지 않는 이세돌 3단의 치밀하게 준비된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세돌 3단은 앞으로 남은 세판 가운데 한판만 이기면 무적 이창호를 꺾고 세계정상에 우뚝 서게 된다. 그러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과연 그가 세계 최강 이창호의 거센 파고를 넘어 이창호와 함께 한국바둑을 이끄는 쌍두마차가 될 수 있을지. LG배 결승전은 분명 그 의문을 푸는 중요한 키를 제시해줄 것이다.

양형모/ <월간 바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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