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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진정한 무대는 ‘무대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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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2-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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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기획자와 출판 편집자의 닮은 인생, 닮은 운명

▣ 이병무 새물결출판사 편집팀장

출판사에 들어오기 전 몇 년 동안 공연 기획 쪽에서 일을 했다. 그때 가장 뿌듯하고 가슴 뛰었던 일이 두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조금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표찰이 붙어 있는 문을 마음대로 열고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관객으로 있을 때는 감히 빠끔 고개를 디밀어볼 생각도 못했던 곳, 저 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저 궁금해하기만 했던 곳이 ‘나의 세계’가 되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독자’에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 자리바꿈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저자가 작가, 번역자가 작품을 해석해내는 연출자, 텍스트가 관객 앞에서 열정을 토해내는 배우라면 지금 나는 또 다른 ‘무대 뒤’에서 일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하지만 이 고리타분한 인간은 천생 이야기꾼은 되지 못할 모양이다. 몇 년 동안이나 무대 생활(?)을 하면서도 변변한 무대 뒤 이야기 하나 할 게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글의 주제가 되어야 할 ‘<사생활의 역사>를 만들면서 겪었던 에피소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의 2천 쪽에 달하는 원고를 주간님 이하 편집부원들이 대여섯 번 넘게 눈이 빠져라 보았다는 이야기, 한 역자 선생님은 원고를 다듬는 와중에 그만 눈병이 도지고 마셨다는 이야기, 안 그래도 조용한 편집실 분위기가 작업 기간 중에는 그야말로 독서실 같아졌다는 이야기, <사생활의 역사>를 만드는 사이에 출판사 사람들의 사생활은 어디 갔는지 잘 보이지 않더라는 이야기…. 뭐,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전부가 아닐까 싶다.

이 정도 이야기야 내용만 조금씩 달랐지 누구나 늘 겪고 있으며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떤 의미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려한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뒤에서 자신의 일과 삶을 열심히 꾸려가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평범함 속에 담긴 특별한 의미를 간파해내는 재주, 평범한 소재를 평범하지 않게 풀어내는 재주는 아무나 가진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사생활이라는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주제를 가지고 이처럼 엄청난 분량의, 그것도 흥미진진한 통찰로 가득한 책을 만들어낸 저자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앞에서 공연 기획 일을 할 때 가슴 뛰었던 일이 두 가지 있었다고 했는데, 이제 그 나머지 하나를 밝혀볼까 한다. 세계의 타악기를 주제로 덕수궁 돌담길 등에서 거리 축제를 벌인 적이 있었다. 나는 온갖 신기한 악기들을 전시해놓고 행인들이 직접 두드리거나 만져볼 수 있도록 한 부스를 맡고 있었다. 어느 날 점심 때가 지나서쯤인가 견학 온 유치원 꼬마 손님들로 덕수궁 돌담길이 복작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맡은 부스의 악기 중에는 작은 통 속에 모래 같은 것을 넣어두어 통을 기울일 때마다 모래 흐르는 소리가 나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한 여자 꼬마 손님이 앞에 서서 그 악기를 신기한 듯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나는 악기를 들어 귀 옆에 대고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때, 바로 그 순간에 안경 낀 여자아이의 얼굴에 가득 번지던 환한 미소란! 그 뒤 몇 년을 그 아이의 미소를 가슴에 담고 공연 기획 일을 했다. 지금도 그렇다. 애써 만든 책을 세상에 내보내고 난 다음이면 나는 언제나 ‘평범한’ 독자들의 진솔한 리뷰를 애타게 기다린다. 독자들과의 교감, 그것이 내가 책을 만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 모든 평범한 독자들, 무대 뒤에서 묵묵히 일하며 살아가는 모든 분들께 존경의 마음을 바친다. ‘사생활의 역사’가 말하고 있듯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이고 이들의 역사가 바로 ‘인간의 역사’이며, 무대 뒤가 실은 진정한 무대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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