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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모든 게 용서돼! 음악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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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3-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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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미학적 힘이 관객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어둠 속의 댄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사진/<어둠 속의 댄서>는 80년대 이후 영화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뮤지컬 양식을 취했다.
새학기가 시작되는 3월은 극장가의 비수기다. 바꿔말하면 개봉관표를 보면서 연구, 검토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는 때다. 막강한 물량공세로 먼지 날리듯 화제를 일으키는 대작영화가 자리를 비운 요즘 두편의 음악영화가 관객에게 아주 특별한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어둠 속의 댄서>와 빔 벤더스 감독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다.

영화문법은 진부할지라도…

80년대 <아마데우스>에서 지지난해 개봉한 <벨벳 골드마인>까지 음악이나 음악가를 주제로 한 영화는 낯설지 않지만 이 두 영화는 현대 대중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뮤지컬(<어둠 속의 댄서>)과 음악 다큐멘터리(<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여느 때 같으면 소수의 영화팬들이 영화제나 비디오숍에서 만날 수 있었을 ‘불편한’ 형식의 영화임에도 두 영화는 화제를 뿌리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감독의 이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운 탓일 게다. 또 <어둠 속의 댄서>가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경우, 지난해 말 나온 음반에 대한 좋은 반응과 함께 2월 초 내한공연이 순식간에 매진을 기록하면서 몰고온 여세의 덕도 크다.


하지만 이 두 영화가 예사롭지 않은 근본적 이유는 영화와 음악의 내면적 결합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영화에는 음악이 있어왔고 쿵작쿵작하는 동유럽의 민속음악이 자주 스크린 안에서 연주되는 에밀 쿠스투리차의 영화처럼 음악이 주요등장인물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온 영화도 적지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화에서 음악은 이야기 전개의 보조수단으로 사용돼왔다. 반면 두 영화는 음악의 미학적 요소를 영화의 전면에 내세운다. 예를 들어 <어둠 속의 댄서>에서 주인공 셀마가 공장에서 갑자기 노래하며 공장 직원들과 군무를 추거나 교수대에서 죽음을 앞두고 노래하는 장면은 이야기의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선 불필요하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아예 쿠바 음악가들의 삶과 음악을 디지털카메라에 기록으로 담고 있다.

칸영화제에서 “영화가 끝나도 객석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는 찬탄과 함께 “트리에가 어둠 속에 빠져버렸다”라는 혹평이 엇갈렸던 <어둠 속의 댄서>의 줄거리는 평범하다. 체코 출신으로 미국의 작은 마을에 정착한 셀마는 집안의 내력인 병으로 점점 눈이 멀어져간다. 그러나 역시 점점 시력이 약해지는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낮으로 주물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모은다. 아들의 수술비를 거의 다 모을 무렵 그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됐고 이를 이용해 파산지경이 된 집주인은 셀마의 돈을 훔친다. 돈을 돌려달라는 셀마에게 집주인은 “나를 죽여달라”고 답하고 셀마는 살인범으로 체포된다. 아들을 수술시키기 위해 돈이 드는 변론의 기회마저 포기하고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 모성애는 지고지순하지만 새롭지 않고, 모성애를 부각시키기 위해 상황을 악화일로로 몰아가는 방식은 진부할 정도라는 평도 있다. 그러나 셀마가 자신의 심정을 노래로 연기하는 장면들은 이 영화의 모든 흠결을 지운다. 이 영화의 음악을 담당했고 단 한편의 영화출연으로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비욕의 토하듯 흐느끼듯 절규하는 목소리가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

‘하나의 동화가 실현되는 장면’

사진/오랜 세월 묻혀 있던 쿠바의 음악인들을 담은 다큐멘터리 <부에나비스타 소설 클럽>. 인위적인 스토리 전개는 찾아볼 수 없지만 드라마에 버금가는 감동을 전달한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무대에서 내려간 쿠바의 음악인들을 따라가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실의 기록이다. 35년 동안 구두닦이를 하면서 살아온 보컬 이브라힘 페레, 시가공장에서 시가를 말던 기타연주자 콤파이 세군도, 50년대를 풍미했지만 20년동안 피아노 없이 살았던 천재 피아니스트 루벤 곤살레스 등 젊게는 60대, 많게는 90대가 돼버린 지난날의 스타들이 재즈 연주가 라이 쿠더에 의해 발견됐다. 카메라는 97년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라는 음반을 낸 다음해 다시 뭉친 이들을 인터뷰한다. 카리브해의 철썩이는 파도 옆으로 쇠락한 건물들이 나른하게 서 있는 아바나. 두꺼운 시가를 물고 걸레질을 하는 중년의 여인, 집 앞에 기대서 행인들에게 일일이 선한 눈인사를 하는 사람들, 적도 지방 특유의 느긋함에 사회주의의 구호와 체 게바라의 포스터가 유유히 포개지고 노음악가들의 연주가 풍경을 휘어감는다. 입을 다물기 힘든 마지막의 뉴욕, 암스테르담 공연은 감독 빔 벤더스도 촬영하면서 예측하지 못했던 영화의 하이라이트. “시작할 무렵에는 이 영화가 스토리를 갖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던” 빔 벤더스는 “하나의 동화가 실현되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재미있는 영화란 이야기가 재미있는 영화이고, 이런 영화의 모든 장치들은 허구의 이야기를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실감나게 하는 데 봉사한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병헌의 죽음이 충격적이라면 마치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이 영화의 훌륭한 조작술 때문이다. 그러나 두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이 두 영화에서 음악은, 각각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이야기와 동등하거나 더 우월한 자격으로 관객과 대화한다.

물론 뮤지컬이나 음악 다큐멘터리가 새로운 장르는 전혀 아니다. 뮤지컬은 1930∼50년대 할리우드 전성기를 빛낸 메이저 장르 가운데 하나였으며, 음악 다큐멘터리 역시 60년대부터 꾸준히 제작돼왔다. 그러나 고도로 양식화된 장르인 뮤지컬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체험을 공유하지 않은 미국 밖의 관객에겐 폭넓은 인기를 얻지 못했고, 본토인 할리우드에서도 80년대 이후론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했다. 음악 다큐멘터리는 처음부터 영화보다는 음악에 가까운 장르, 또는 영화감독이 잠시 외유하는 장르 정도로 인식돼왔다. 따라서 정말 흥미로운 점은 거장 대열에 올라 있는 감독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음악의 미학적 힘을 앞세운 영화를 만들었고 그것이 세계적인 화제를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스크린의 전면에 음악을 내세운 감독이 둘만은 아니다. 일반적인 경향은 아니지만 적지않은 감독들이 음악적 영감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은 판소리가 기존 영화문법을 제압한 영화다. 예를 들어 방자가 춘향에게 이도령의 말을 전하러 가는 장면에서 임 감독은 흘러나오는 판소리의 리듬에 맞춰 방자를 뛰게 만들었다. 춘향이 변사또에게 곤장을 맞는 대목에선 춘향의 비명과 항변을 판소리가 대신한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이 시도에 유럽 비평가들은 찬사를 보냈다. 지난해 말 개봉된 차이밍량의 <구멍>에서도 전염병과 오염으로 가득한 아파트에 살던 여주인공이 난데없이 노래를 부르면 갑자기 주위는 카바레 무대처럼 변하고 무희들이 튀어나오는 황당한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춘향뎐>에서 <벨벳 골드마인>까지

좀더 대중적인 영화로는 지지난해에 개봉된 <벨벳 골드마인>이 있다. 7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글램록 스타의 실종 미스터리를 다룬 이 작품은 전편이 하나의 노래처럼 느껴질 정도로 음악적 리듬으로 휘몰아쳐간다. 감독 토드 헤인즈는 이 영화가 “글램록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바로 글램록 자체이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을 하나의 유행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많은 진지한 감독들이 이제 음악을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영화의 형식 자체를 혁신하는 미학적 원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 철학자이자 음악이론가였던 아도르노는 말했지만 오늘의 많은 영화감독들은 자신의 영화가 스스로 음악의 상태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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