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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자이니치가 당신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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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1-10 00:00 수정 : 2008-09-1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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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대신 인간의 삶을 말하는 신숙옥씨의 <자이니치…>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재일조선인 인권운동가 신숙옥씨의 <자이니치, 당신은 어느 쪽이냐는 물음에 대하여>(강혜정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를 ‘다시’ 읽는다. 몇 주 지난 책이지만 지금 곱씹어봐야 할 무언가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란 핵실험을 둘러싼 남·북·미·일의 ‘생쇼’ 1라운드가 끝나가는 시점이다. 신숙옥씨는 이 국가권력들의 아수라장 속에서 ‘국적’의 의미를 묻는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자. 어머니가 몇 번이나 같이 죽자며 목을 조른다. 죽기 싫지만 어머니가 애처로워 언제나 “응”이라 대답한다. 몽롱해진 의식 속에서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자이니치…>에는 지옥이 담겨 있다. 조선학교에서 교사에게 폭행을 당해 디스크에 걸린 자신. 볼이 찢어져 이가 드러날 정도까지 폭행당한 뒤 폭력단의 세계로 들어간 동생. 북한으로 간 뒤 누이보다 늙어버린 외삼촌과 “다 도둑놈이야!”라고 외치며 숨을 거둔 외할머니. 잃어버린 조국, 생존권과 시민권의 박탈, 이로 인해 찾아온 생활고, 좌절감이 불러온 가족 안의 폭력, 그리고 외면, 외면들…. 이것은 해방 뒤 일본에서 살아남은 나이든 재일조선인에겐 너무나 익숙한 지옥이다. 재일조선인 사회는 작은 지옥이었고, 밖의 일본 사회는 더 크고 음흉한 지옥이었다.


그러나 <자이니치…>는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비극에 빠져들지 않고, 비극을 사색해야 한다. 신숙옥씨는 2000년 3월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인터뷰한다. 책의 2부는 탈북자들이 털어놓는 끔찍한 지옥이다. 그는 탈북자들에게 ‘뿌리뽑힌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동질감을 느낀다. “네 개의 국가가 무거운 바위처럼 짓누르고 있었다. 일본, 한국, 미국, 그리고 북한.”

그는 독설들을 쏟아낸다. 민단과 총련은 분단을 등에 업고 재일조선인들을 쥐어짜기 바빴다. 그들의 화해 제스처도 기만에 불과했다. 북한은 사회주의의 위상을 과시하려 재일조선인을 받아들였지만 극한의 삶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지금은 거대한 병영국가로 인민의 삶을 짓밟고 있다. 일본은 이슈만 터지면 재일조선인들에게 저주와 폭력을 퍼부었다. 지은이는 심지어 9·11이 터졌을 때도 테러당하지 않을까 걱정부터 했다. 끝까지 재일조선인들을 외면한 한국은 어떤가. 그는 김대중과 김정일의 회담까지도 ‘배부른 자들의 만남’이라고 일축한다. 이것은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는 어느 나라 국가도 부르지 않고 어느 나라 국기도 게양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국가권력의 정반대편에 있다. 그래서 북한 정권에 대한 평가와 관계없이 인도적 지원은 계속돼야 한다. 누가 인간의 삶을 가지고 편을 가르며 장난질을 칠 수 있는가. 중요한 건 미국과 북한의 싸움이 아니다. 국가 대 인간의 싸움. 이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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