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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영화 사랑, 부산에서 축복받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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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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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의 새 거점 해운대에서 축제 열기와 호젓함을 동시에 맛보다…내년 찾을 관객에게 미리 전하는 영화 선택 요령 “‘쥐약’ 단어는 피해가세요~”

▣ 황진미 영화평론가

부산은 흥미로운 도시이다. 첨단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토속적인 구석이 있다. 가령 부산역 화장실에는 비데가 설치된 변기도 있고, 부산지하철에는 매표원마저 없다. 매표는 물론 경로우대증이나 생수까지 자판기로 해결한다. 하지만 부산역 광장은 여전히 뭔가를 외치는 사람들로 떠들썩하고, 지하철 승객들은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큰소리로 사담(私談)을 즐긴다. 남을 배려하고 조심하기보다는- “우리가 남이가?”- 가족처럼 거리낌이 없고 활력이 넘친다.


부산영화제의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규모 있는 국제영화제로서 많은 해외 영화들과 화려한 행사들이 펼쳐지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왁자하게 쏟아져나온 젊은 관객들이다. 특히 현지 젊은 관객들의 어우러짐이야말로 부산영화제 최대의 힘이 아닐까 싶다. 현지 관객과 호흡하지 못하는 영화제의 입지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부산의 저변 인구와 시네필의 활력은 부산영화제의 밑동을 든든히 받치는 인프라이다.

길 묻다 듣는 말 “저 한국인 아니에요”

남포동과 해운대 두 곳으로 나뉘어 열리던 영화제가 올해부터는 해운대로 거점이 모아졌다. 해운대역 메가박스 외에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인 장산역 CGV와 프리머스에서 대부분의 상영이 이루어지고, 남포동에서는 대영극장 한 곳에서만 상영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외지인들은 숙박과 관광의 이점이 있는 해운대로 몰렸다. 하지만 대영극장 주변의 열기도 아주 식은 것은 아니었다. 대영극장과 부산극장 사이의 좁은 골목에 설치된 무대 주위엔 주로 현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영극장 주변은 해운대까지 가기엔 먼 구시가지 사람들에게 영화제의 열기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으로 남았다.

그래도 부산영화제의 정취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해운대 백사장이다. 컨테이너로 만든 파빌리온 가건물 주위엔 야외무대와 관객카페, 각종 홍보부스가 설치되어 사람들로 많이 붐빈다. 야외무대에 행사가 있을 땐 스타들의 ‘직찍’을 한 컷 얻으려는 인파로 북적인다. 여기서 길을 물으려면 반드시 부산말로 떠드는 사람에게 물어볼 것. 아무나 잡고 물었다간 “저 한국 사람 아니에요”라는 대답을 듣기 일쑤이다. 한류스타의 얼굴을 보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 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사가 없을 때 이곳 바다는 파라솔과 비치의자에서 호젓하게 낮잠을 즐길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이 된다. 아, 비치의자에 누워 파도소리에 귀를 간질이며 깜빡 잠들었던 두 시간의 짜릿함을 어찌 잊으랴.

영화 이야기를 하자면, 10편의 영화를 감상한 이번 영화제에서 개인적인 베스트는 <카불 익스프레스>이다. 9·11 이후 미군의 공격이 이루어진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외국 종군기자와 도주 중인 탈레반 잔당 사이의 인질극을 재치 있게 그린 영화이다. 영화는 일단 황량한 아프가니스탄의 풍광과 택시를 부르면 탱크가 오는 전시 상황의 뜨악함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영화는 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단순히 탈레반이 나쁘다거나 그렇다고 미국이 나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성 학대 등 탈레반 정권의 악행에 대한 비판을 지우지 않으며, 미군 진입 뒤 탈레반 잔당을 잡아 죽이는 반군의 살기등등함도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비판의 초점은 탈레반 정권을 실질적으로 지원했던 파키스탄이 전쟁이 나자 미국 쪽으로 돌아서 탈레반 정권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국제정치의 아이러니’에 있다.

개인적인 베스트 <카불 익스프레스>

도주하던 탈레반 잔당이 인질로 잡고 있던 ‘나이롱 무슬림’ 인도 기자와 마음을 나누게 되고, 마침내 그들과의 신의에 힘입어 국경 지역까지 도망치는 데 성공하지만, 아군이라 믿었던 파키스탄군에 의해 사살된다. 영화는 차를 가로막는 시골 당나귀에 빗대어 무시무시한 이슬람 자살폭탄 테러도 실은 ‘생계형 범죄’와 같다는 우의를 전한다.

그 외에도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멕시코 농민의 도저한 저항정신을 그린 <바이올린>도 큰 울림을 전하는 영화였다. 만약 국내에서 다시 상영되는 일이 있다면, 아는 사람들을 죄다 끌고 가 다시 보고 싶은 영화이다. 또 오스트레일리아를 배경으로 원주민 변사체를 대하는 백인의 태도에서 도덕과 미시정치의 경계를 되묻는 <진다바인>도 아찔한 각성을 전하는 영화였다. 그리고 “믿-숍니까?”를 연발하는 세르비아 영화 <낙천주의자들>이나, 트로트를 영화음악으로 쓴 헝가리 영화 <신선한 공기>는 정서적인 공감을 쉽게 불러일으켜서 “동유럽이 이상하게 우리랑 비슷하네~”를 되뇌게 했다.

끝으로 내년에라도 부산영화제를 찾아갈 분들을 위해 영화제에서 영화를 잘 고르는 요령을 하나 조언하려 한다. 무엇보다 자기 기준을 확실히 정할 것. 영화제가 처음인 관객들은 수많은 영화들 중 어떤 영화를 고를지 막막하다. 그래서 해외영화제 수상작을 위주로 고르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그런 영화일수록 졸립다는 거~!” 영화를 선정하는 기준은 수상 경력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이 되어야 한다. 가령 영화를 보는 목적이 감동을 받기 위함인지, 견문을 넓히기 위함인지 따져보라. 견문을 넓히려는 관객이라면 선택이 좀 쉽다. 평소에 거의 볼 일이 없는 나라의 영화를 보는 것이다. 가령 아프가니스탄이나 파라과이 영화를 보면 풍물만 ‘눈에 발라도’ 견문을 넓히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된다. 또 익숙한 나라의 영화라도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고르면 어쨌든 역사적 사실은 건질 수 있다. 감동을 위주로 보는 관객이라면 소책자의 시놉시스를 찬찬히 읽으며 마음을 잡아당기는 키워드가 있는지 살핀다. 없다면 익숙한 장르를 위주로 고르는 수밖에 없다. 가령 가족극이라거나 유머러스한 영화라거나 하는 식의. 그래도 영 못 고르겠으면 자신에게 ‘쥐약’인 단어를 찾아 하나씩 지워나가는 것도 방법이다. 뭐 ‘의식의 흐름’이라든가 ‘몽환적 화면’ ‘흑백의 다큐멘터리적 카메라워크’ ‘독특한 미장센’ ‘실험적인 기법’ ‘작가주의적 고뇌’ 등 자신과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단어가 들어간 소개문의 영화를 제외시켜나가는 것이다. 영화를 많이 보는 관객이라면,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 볼 영화를 우선해서 고르는 것이 유리하다. 가령 국내 영화들은 조만간 개봉을 하거나 독립영화라 해도 어떤 식으로든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고, 거장들의 옛 영화나 해외영화제 수상작들도 언젠가 다시 볼 일이 있겠지만,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온 따끈따끈한 영화들은 좀처럼 다시 볼 기회가 없는 영화들이다.

또 만나기 어려운 제3세계 영화는 어떤가

부산영화제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축복이다.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한글 자막의 지원을 받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동시대적 영화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혜택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아름다운 해변에서 친한 이들과 여흥을 즐기며 함께 한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추억인가. 내년에도 부산에선 횟감처럼 싱싱한 축제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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